조카들이 인형 놀이를 한다.
금발머리에 9등신 몸매 바비 인형에게 드레스, 정장, 작업복을 입혀보며, 이런 저런 역할 놀이에 여념이 없다.
하이힐, 가방, 부채, 모자, 각종 장신구 등등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게 오밀조밀 작으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다.
이번에는 공주에게 내복을 갈아 입히겠단다.
ㅎㅎㅎㅎ
아니, 공주가 왜 내복을 입겠어?
왕의 딸인 공주가, 속옷도 아니고, 방한용 내복을?
내복이란 추위에 덧입는 실용 의류이다. 아니 그야말로 생존템이다.
천 개 정도의 방이 있는 궁전에서 나고 자라, 제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공주가, 두터운 내복을 입다니. ㅋㅋ
내가 아는 공주들은 잔뜩 부플린 치마를 입고, 드높이 올려 휘황한 머리를 하고서, 화사한 화장에 레이스와 비단으로오묘한 빛을 냈다. 앙징맞고 화려하고 맛난 것들을 아주 조금씩 먹는 여자들인데.....
한데 내가 사랑하고 기억한 공주들은 하나같이 내복을 입었다.
소공녀의 세라도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영락했을 때 기꺼이 내복을 입었다. 아니, 내복도 못입어 추위에 떨면서도 긍지를 지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도 가족과 타라를 지키려고 내복을 입었다.
고려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도 빠지면 섭섭하다.
공민왕의 노국 공주 역시 그랬다.
호동 왕자의 낙랑 공주도 자명고를 찢으며 내복을 찢기고 죽는다.
운동을 해서 근육을 기를 때도 나는 겨울에 입을 내복을 마련하는 중이라 상상했다.
아니, 갑옷을 맞춰가는 셈이라고 주문을 걸었다.
물론 가끔 먹고 싶은대로 다 먹어 살이 피둥피둥 쪄서 옷이 잘 맞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내복을 입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방층 역시 나를 보호할 내의가 되리라 믿었다.
때로 나에 대한 믿음과, 긍지가 넘칠 때도 나는 한겹 더 껴입은 셈이었다.
어떤 추위와 바람에도 끄덕없을 수 있었으니까,
당연히, 헐벗은 듯 춥고, 서러워서 내복을 겹쳐 입어도 도저히 견디기 힘든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책을 읽었다. 기도를 했다.
그렇게 오늘은 벌써 입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