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에 중앙 국립 박물관이 재개관했을 때 나는 8000년전의 고래를 만났다 .
1층 선사시대관 입구에는 반구대 암각화 탁본이 걸려있었다.
그 앞 에서 아주 오래동안 서있었다.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탁본에서 나는 고래를 찾았다.
고래 잡이를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 그는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헤엄치며 놀았다고 했다.
전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 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희귀한 곳이라고 들었다.
신석기 말 청동기 초로 추정되는 무려 8000년전, 고래 사냥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자랐다고 했다.
여름에 가물어 수위가 낮아지면 가까이 가서 볼 수 도 있는데 배를 타거나 헤엄쳐 가서 봐야 한다고 했다.
근처의 사연댐이 준공되면서, 수몰될 뻔하다가 겨우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나를 데려가 보여주겠노라 약속했다.
언젠가 꼭 한번은 직접 보고 싶었다.
고래 잡는 이들이 새겨진 바위를 , 물에 잠겨서 자꾸만 헤져간다는 돌새김 그림을,
몇 년을 벼르다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 고래를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고속 버스를 타고 언양 터미널에서 내려 언양 장 정류장서 배차간격이 무진장 긴 버스를 탔다.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정거장에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했다.
영남 알프스답게 울창한 산세가 펼쳐지고, 산을 따라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이 휘돌아 나간다.
회룡포나, 하회마을 , 설악산의 오색 마을과 비슷하다.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로 가는 길이어서일가, 그윽하고 고즈넉하면서 깊고도 비밀스럽다.
이렇게 깊은 계곡을 그들을 어떻게 찾아냈을까 싶다.
고래는 또 어떻게 그 계곡에 이르렀단 말인가,
바위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를 기억했다.
이토록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자연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넘치도록 사랑받았으리니,
그는 고래가 되었겠지. 향유 고래, 흰수염 고래, 혹등 고래...
내 곁을 떠나 큰 바다에서 , 마음껏 자맥질하며, 숨쉬러 솟구쳤다가 다시 더 먼 바다로, 식솔을 이끌고 떠날테지.
얼마나 다행인가, 반구대가 그를 품고 키운 것이,,,
내가 미처 주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을 그는 이미 다 받았으리니,
나는 늘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끌린다. 그들이 어린 시절 자연으로부터 받은 무진장의 사랑만으로 평생 풍요롭고 강건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내리막으로 내리막으로 하염없이 걷다보니, 별안간 눈이 확 트이면서 해안을 닮은 나지막한 공터와 맞은 편 너럭 바위가 보인다.
여기가 그의 고향, 반구대 암각화란다.
반구대 암각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간은 오후 4시. 해질녘에 낮게 뜬 햇살이 바위 절벽에 비치면 음각으로 새겨진 암각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높이 4m, 너비 8m의 바위를 캔버스 삼아 그려진 그림은 모두 300여 점. 이 중에 고래가 52마리나 된다. 또한 호랑이, 표범, 사슴, 여우, 늑대 등 각종 동물을 비롯, 배를 탄 선원, 춤을 추는 사람들까지 빼곡하다. 7000년 전의 세상이 바위에 펼쳐져있다.
선사시대 울산은 바닷물이 태화강 중류까지 들어와 300미터에 달하는 내만이 만들어져 지리학으로 고울산만으로 불린다.
울산만은 예나 지금이나 고래가 자주 나타난다. 선사인들은 먹이(특히 미역)를 따라 또는 얕은 바다를 찾아 고울산으로 들어온 고래를 수심이 더 얕은 곳으로 몰아 '좌초"시켜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래사냥’의 전과정(탐색-사냥-인양-해체)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이란다. 그들은 등뼈 지느러미에 커다란 작살을 꽂고, 그물로 쳐서 고래를 사냥한다. 작살이 꽂혀 피를 흘리다 힘이 빠져 죽은 고래를 찾기 위한 표식용 부구(浮具·가죽을 이용해 물에 뜨게 만든 기구)도 그려져 있다. 배 위에 탄 사람들이 고래를 끌고 가고, 죽은채 항구에 거꾸로 내려진 고래의 배에 칼집을 내는 그림도 있다. 고래 부위별 해체 과정은 현대에도 그대로라 한다.
태평양, 동해와는 100리 넘게 떨어져 있으니 여기는 필경 재단이었지 싶다. 고래 잡는 법을 교육하고 무사를 기원하며 풍요를 감사드리는 신성한 곳이었으리라,
옛 문헌에도 고래가 새끼를 낳고 미역을 먹기위해 찾아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나라 ‘초학기’(初學記)에는 “고려 사람은 새끼를 낳은 고래가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국을 먹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누군가가 고래의 배 속으로 빨려들어 갔는데 새끼를 막 낳은 어미고래의 배 속은 미역으로 가득했다. 미역으로 인해 악혈, 즉 굳은 피가 묽고 맑아져 있었다. 천운으로 살아 돌아온 그 사람에 의해 고래가 산후조리에 미역을 먹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산모들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도록 했다”는 것이다.
나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지켜봤다.
새끼를 낳은 고래가 동해의 돌미역을 뜯어먹으러 울산만까지 오는 풍경을
그 새끼를 업고 물을 뿜으며 다시 멀어져 가는 모습을...
깊은 계곡의 해는 암각화를 비춘 후 수직으로 떨어진다. 무섭도록 빨리 떨어진다.
공룡 발자욱이나, 전천리 각석도 지척이었으나, 볼 겨를이 없다.
5시도 채 되기 전에 반구대를 떠났어도 곧 사위가 깜깜해진다.
신석기 청동기로 가는 길을, 고래을, 고래잡이들을 두고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