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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정든 유곽에서, 남해금산

    이성복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그의 시는 197-80년대 한국 남자들이 비친다. 

1930년대 문학을 보면 찌질하기 그지 없는 사내들 투성이다. 

200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 남성들은 변했다. 새천년의 한국 사람을 미루어 짐작케한다. 

이성복의 시는,

 

유곽이라니.

무슨 뜻인지 몰라서, 사전으로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1900년대 문학 속 "기둥 서방"들의 후예다. 이성복 시는. 

"정든"이란 형용사도 새로웠다. 

화냥년이

미군부대 양공주가 곧 우리나라였다. 

 

 

정든 유곽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남자(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모란(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당한 여자(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병(病)을 돌보던 청춘(靑春)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祖國)의 신체를 지키는 자(者)는 누구인가 일본(日本)인가, 일식(日蝕)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워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 말고 내 목마른 나신(裸身)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昇天)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越境)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呻吟),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날으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 부를 때, 전쟁(戰爭)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革命)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行進)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祖國)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後世)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口味)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韓族)의 별

 

 

연애 소설이 역시 최고다.

연애 시가 역시 최고다. 

 

이런 시를 내게 써준다면 나는 목숨을 바쳤으리.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당신

 

 

이른 아침 차를 타고 나가 보니 아낙네들은 얼어붙은 땅을 파고 무씨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네들의 등에 업힌 아이들은 고개를 떨군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남정네들은 어디 갔는지보이지 않았습니다 논두렁에 불이 타고 흰 연기가 천지를 둘렀습니다

 

진흙길을 따라가다 당신을 만났습니다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당신은 아직 물이 마르지 않은 뻘밭에서 흙투성이 연뿌리를 캐고 있었습니다

 

혹시 당신이 찾은 것은 연뿌리보다 질기고 뻣센 당신의 상처가 아니었습니까 삽에 찍힌 연뿌리의 동체에서 굵다란 물관 구멍을 통해 사라진 것은 도로(徒勞)*뿐인 한 생애가 아니었습니까 목청을 다해 불러도 한사코 당신은 삽을 찍어 얼어붙은 연뿌리를 캐고 있었습니다

 

 

 

                               그대 가까이 2

 

 

자꾸만 발꿈치를 들어보아도 당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들어요

까마득한 하늘에 새털구름이 떠가고 무슨 노래를 불러 당신의 귓가에 닿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만나지 않았으니 헤어질 리 없고 헤어지지 않았어도 손 잡을 수 없으니 이렇게 기다림이 깊어지면 원망하는 생각이 늘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