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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문해력유감2-기빨린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지금은 20대 청년이 된 아이가 어릴 적 자장가로 불러줬던 "섬집 아기"입니다.

매일 불러줬더니, 돌무렵에는 "엄마가~" 소절만 나와도, 금세 잠이 들 정도였지요.

두 돌이 채 돼지 않았을 때인가, 여느 날처럼 섬집 아기를 부르는데, 아이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엄마 그 노래 부르지 마요. 너무 슬퍼요" 하는 겁니다.

 

상상해보세요.

이 노래에는 아버지,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물론, 고양이 한마리 개 한마리도 없이 아이랑 엄마 단 둘입니다.

물론 바다가 저 멀리서 철썩이며 아이에게 말걸며 달래주고 잠도 재워 주지만요.

엄마는 아이를 홀로 두고, 섬 그늘에 굴을 따러 갈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이는 무엇을 먹고 누구랑 놀까요?

파도 소리 들으며 엄마를 기다리다 잠드는 아가의 노래입니다.

가사를 들으며 제 아이는 두려워하고 슬퍼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문해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글을 읽거나 듣고, 머리 속에 그림을 그려내면서 감정 이입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때로는 매우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삶이 거의 다 그렇듯이요.

 

얼마전, 수업 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하"하면서 바로바로 반응을 보이는 지윤이이와 이야기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의 말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가 더 중요하다. 그걸 지윤이는 일찌기 깨닫았으니 넌 참 똑똑하다고 인정해줬읍니다. 그러나, 진정한 대화란 상대방의 말을 새겨듣는데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무조건 긍정적 리액션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학년인 주한이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영어 수업에 들어온 주한이는 토할 것처럼 힘들다고 했습니다.

이유인 즉, 패드립, 중 1 남학생들이 학교에서 성적인 표현을 써서 부모를 욕하는 말들이라지요. 주한이는 그 말들의 뜻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그려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당연히 독보적인 언어 실력으로 늘 저를 놀랍게 하지요.

그런 주한이는 중 1 남학생들이 하는 패드립들을 들으면서 각 단어의 뜻을 생각하고 그리다 보니, 한강의 '채식주의자"쯤이야 약과인 끔찍한 장면이 머리속에 그려질 테지요. 그 결과 혐오스러울 정도로 힘들었구요.

 

지윤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지혜로워서, 친구들이 상스러운 말을 한다싶으면 그냥 귀를 닫아버리고 지나치지만, 주한이는 하나하나 새겨 듣다보니, 괴로운 거라고,

그만큼 너와 주한이는 다르고 각 상황에 필요한 자세를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공부할 때, 문해력을 키우려면, 말을 읽거나 들으면서 그 뜻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가야 한다고,

그 과정이 때로는 즐겁고 신나고 아름다울 수 도 있지만,

대부분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들다고요.

 

낯섬, 두려움, 어색함 등등 수많은 감정이 따라오는데 그 모든 감정을 다 안고 가면서 머리를 쓰고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기란 여간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기호(글자)를 살피며,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다 발휘해서, 저자와 글에 감정 이입하는 것이 문해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자어에 얼마나 능통한지. 얼마나 어휘를 많이 익혔는지를 넘어서는 감정 이입과 감정 처리 능력이 바로 문해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머리 써서 집중해야 하는 글을 읽은 후 학생들이 흔히들 "기 빨린다"고 호소합니다.

맞습니다.

 

문해력을 키우려면 그러니까 기운이 넘쳐야 합니다.

잘 들어야 하고,

주의깊게 읽어야 하며

일단은 타자에 감정이입해야 하니까요.

 

그렇습니다.

기 빨립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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