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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도둑맞은 가난,

한동훈이 "스타벅스는 서민들이 못오는 곳"이라 하고 백사 마을 가서, 연탄을 날랐다고 한다. 

"도둑맞은 가난"을 가져와, 매번 선거때마다, 서민을 위하는 척 연기하는 정치인들을 비꼬는 칼럼도 보였다. 

1971년 나목으로 여성 동아에 등단하여,40년간 "서 있는 여자"로 줄기차게  중산층의 허위와 속물의식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듯, 보여줬던 박완서 작가의 비교적 초기작이다. 

 

가난도 도둑맞을 수 있을까, 

구로동 쪽방촌, 

노동 운동하던 대학생들과 여공의 이야기로도 얼마든 바꿀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봤던 소설이다. 

 

다시 보니. 

가난을 대하는 여러 태도가 보인다

상훈과, 상훈 아버지. 

여 주인공과 그 부모님, 

어머니의 친구들,, 

 

박완서 - 도둑 맞은 가난
 
 
상훈이가 오늘 또 좀 아니꼽게 굴었다. 찌개 냄비를 열자 두부점 위에 하필 커다란 멸치 놈이 올라와 있었고, 그걸 본 상훈이는 허연 멸치 눈깔 징그럽다고 대가리는 좀 따고 넣으면 어떻겠냐고 했다. 점잖게 눈살까지 찌푸리며 그런 소리를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 보란 듯이 대가리를 따서 입 속에 넣고 자근 자근 씹으며 대가리에 영양분이 더 많은 것도 모르느냐고 대거리를 했다. 멸치가 아무리 커도 멸치는 멸친데 그까짓 멸치 대가리에 달린 파리똥만 한 눈깔 따위에 다 신경을 쓰는 상훈이가 나는 아니꼽기도 하거니와 막연히 불안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저를 얼마나 마땅찮아하고 있나를 나타내기 위해 입을 삐죽하며 눈을 보얗게 흘겨 줬다. 그러나 상훈이는 탓하지 않고 곧 내가 하는 대로 덩달아 부두점과 우거지를 헤치고 멸치를 찾아 먹기 시작했다.
"제기랄 눈 감고 죽은 놈은 한 놈도 없잖아."
"제 명에 못 죽었으니까 그렇지 뭐."
"그럼 도미나 대구 같은 점잖은 생선도 눈 뜨고 죽게."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우린 같이 낄낄대며 아침을 게 눈 감추듯 달게 먹었다.
"어때, 여자하고 같이 사니까 좋지?"
"응, 그렇지만 방이 너무 좁아서 너 불편하지 않아?"
나는 이 동네선 이만한 방에 대여섯 식구씩은 다 산다며, 저하고 나하고 같이 살게 된 후 절약되는 돈 액수를 또 한 번 조목조목 따져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따질 때마다 신바람이 났다. 먼저, 절약되는 액수 중 제일 큰 몫을 차지하는 방세 사천 원, 그러고 나서 연탄값, 반찬값, 양념값 등 덜 드는 걸 시시콜콜 따지자면 한이 없었다. 그렇지만 두 가구가 한 가구가 됨으로써 이익 보는 수돗값, 전깃값, 오물세까지 따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일부러 빼 먹었다. 서로 좋아한다는 것, 실상은 이게 둘이 같이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텐데 나는 그 말을 번번이 빼 먹었다. 그 말에 부끄럼을 타기도 했지만, 그 말만은 상훈이가 나에게 하게 하고 싶었다. 나는 같이 살자는 제안을 내 쪽에서 먼저 하면서도 그 말을 안 했다. 심지어 두 방을 쓰다가 한 방을 쓰면 연탄을 네 장에서 두 장으로 절약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둘이 한 이불 속에서 꼭 껴안고 잠으로써 다시 하루 반 장 내지 한 장의 연탄을 더 절약할 수 있다는 소리까지 거침없이 하는 배짱이 그 소리는 안 했다. 안 한 게 아니라 아껴 두었다. 언제고 제가 나에게 그 소리를 하게 할 테다. 나는 그렇게 벼르고 있을 뿐이다.
 
도시락을 싸서 상훈이를 먼저 내보내고 나는 서둘러 설음질을 했다. 상훈이는 멕기 공장에 다녔다. 은반지를 감쪽 같이 금반지로 만들기도 하고 백통수저를 은수저로 만들기도 하는 곳이란다. 아무려면 진짜 금반지하곤 어디가 달라도 다르겠지 했더니 절대로 눈으로 봐선 다른 걸 알 수 없을 만큼 그 멕기 기술이란 게 희한하단다.
내가 설음질을 할 때 쯤은 나란히 달린 여섯 개의 방마다 설음질할 시간이었다. 방 앞에 달린 쪽마루에서 설음질들을 했다. 쪽마루 밑에는 연탄 아궁이가 있고, 쪽마루 위에는 식기, 바께쓰, 간장병 따위가 있으니까 쪽마루가 조리대, 싱크대가 되는 셈이었다. 집 주인이 셋방에 부엌을 만들어 준답시고 추녀 끝에서 블록담까지 사이의 무명 폭만 한 하늘을 아예 슬레이트와 루핑 조각으로 막아 버려 명색이 부엌인 이 속은 침침하고 환기도 안 된다. 늘 연탄 가스와 음식 냄새로 숨이 막힐 것 같다. 매캐하고 짜고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냄새가 밖에서 갓 들어서면 눈이 실 만큼 독했다. 이 냄새는 방에도 옷에도 이부자리에도 배어 있었다. 내 몸에도 이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냄새를 부끄러워하거나 싫어하면 안 된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와 오빠가 이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냄새를 맡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만 남겨 놓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못난 부모 동기에 복수하는 뜻에서도 이 냄새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설음질들을 하면서 누구나 나에게 말을 시키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내가 끌어들인 청년에 대해 모두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별 악의가 있어 뵈지는 않았다. 제일 끝 방 아줌마가 혀를 끌끌 차며 힐끗 내 눈치를 보는 꼴이 냉수라도 떠 놓고 예를 갖추라는 소리가 또 나올 것 같았다. 나라고 그런 소리를 아주 귀 담아 듣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까짓 거 예만 갖출까, 이왕이면 여섯 방 아줌마들에게 국수 대접인들 못할까도 싶었다. 그렇지만 상훈이 제가 먼저 나를 좋아한다고 하기 전에 그런 일로 돈을 쓰다니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나에게 말을 못 시키기 목청껏 노래를 뽑으며 설음질을 했다. 그까짓 두 식구 설음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한 곡을 부를 사이도 안 걸렸다. 나 뿐 아니라 이곳 셋방 여자들은 설음질을 대개 이렇게 후다닥 엉터리로 해치웠다. 공장이나 취로 사업장으로 나갈 시간이 바쁘기 때문이었다.
 
밖은 바람이 칼날같이 매운 겨울 아침이었다. 바람이 쓰레질하듯 길바닥을 핥으며 연탄재와 더러운 종잇조각을 한 군데로 수북이 쌓아 놓았다가 다시 회오리 바람이 되어 공중 높이 말아 올려 삼지사방으로 더러운 진애(塵埃)를 살포했다. 뺨이 아니고 눈 앞의 모든 것이 흙먼지 속에 부옇게 흐려 뵀다. 비탈에 닥지닥지 붙은 집들의 지붕을 덮은 슬레이트나 함석 조각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고개가 목도리 속에 자라 모가지처럼 움츠러 들었거나 아예 머리통은 눈만 내놓고 강도처럼 복면을 하고서도 용케 만나는 사람마다 서로 잘 알아봤다.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나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삽을 들고 취로 사업장으로 나가던 어떤 아줌마는 눈을 찡긋하며 너 요새 재미 좋다며 하기도 했다. 그럴 때 이 아줌마는 겹겹이 걸친 누더기 밖으로까지 이상하도록 짙은 색정적인 걸 발산했다. 나는 사춘기에 암내 나는 동물을 보았을 때처럼 부끄러움과 징그러움과 미묘한 호기심을 동시에 이 여자한테 느꼈다. 그리고 연탄 반 장을 아끼기 위해서라는 칭계로 한 이불 속에서 꼭 껴안고 자는 상훈이와의 뭔가 막연히 미흡한 교접을 생각하고 불안해졌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 아침의 산동네 골목 골목은 살아 있는 것처럼 힘차게 꿈틀거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마치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청청한 생기에 넘쳐 있다.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치를 떨며 경멸했던가. 배알도 없는 것들이 천덕스럽고 극성스럽기만 하다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을 꼬여서 같이 죽어 버렸던 것이다. 흡사 찌개 속의 멸치처럼 눈을 동자 없이 하얗게 뒤집어 쓴 추한 주검과, 냄새 나는 가난을 나에게 떠맡기고. 그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거부한 가난을 내가 지금 얼마나 친근하게 동반하고 있나에 나는 뭉클하니 뜨거운 쾌감을 느꼈다. 그들은 겉으론 가난을 경멸하는 척 했지만 실상은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뽐 내기 좋아하는 소년처럼 가슴을 펴고 비탈길을 곤두박질하듯 달렸다.
 
공장이라 부를 것도 없는 서너 간 정도의 온돌방에는 쏙닥거려 놓은 헝겊 조각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창가엔 세 대의 미싱이 놓여 있다. 주인 아줌마가 피륙을 겹겹이 겹쳐 놓고 본을 대고 면도칼로 오리는 일을 하다가 나를 쳐다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주인 아줌마가 피륙을 이렇게 잘게 쏙닥거리는 걸 볼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올 만큼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인형도 입을 것은 다 입는다. 팬티도 만들고 앞치마도 만들고 브래지어도 만들어야 한다. 원피스엔 주머니도 달고 단추도 달고 수까지 놔야 한다. 속치마에 레이스도 달아야 한다. 이런 일은 다 철저한 분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코딱지만 한 인형 옷 하나 만드는 데도 몇 사람의 손이 가야 한다. 나는 온종일 아줌마가 쏙닥거려 놓은 걸 미싱으로 박기만 하면 된다. 꼬마 옷을 한없이 박음질하다 보면 나는 마치 내가 꼬마 나라에 유배되어 옷 짓는 노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인 아줌마도 저녁 때쯤은 지쳐서 나더러 어깨를 쳐 달라며 같잖은 것들이 옷들도 육실하게 입어 싼다고 욕을 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이 옷을 입어쌓지 않고 벌거벗고 살게 되는 날이면 주인 아줌마도 나도 밥줄이 끊어지고 만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나는 미싱을 놀리며 언제고 양재를 배울 것을 꿈 꿀 때가 제일 즐거웠다. 옷 다운 옷을 만드는 일류 재봉사가 되어 일류 양장점에 고용될 날을 막연히 꿈꾸며 재봉틀을 놀리면, 이런 단조로운 작업도 한결 덜 지루했다. 내가 일류 재봉사가 된 후에도 상훈이가 멕기 공장 직공이어도 괜찮을까, 그걸 잘 모르겠어서 약간 고민도 되었다. 은반지를 감쪽같이 금반지로 만드는 일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지만 너무 요술기가 있어서 사기꾼 같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상훈이 말로는 장사꾼들이 그걸 갖다가 금반지로 속여 파는 일은 없고 다만 금반지를 끼고 싶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싸게 팔 뿐이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도 싶었다. 실상은 나도 그런 거라면 하나 끼고 싶었다. 언제고 한 번은 상훈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하긴 할 테고, 그 때 넌지시 멕기한 금반지를 내 손에 끼워 주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 얼마나 무드가 날까.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도 그게 멕기한 반지란 걸 알리지 말아야지. 이런 공상은 절로 웃음이 비죽비죽 나올 만큼 행복한 공상이었다.
 
그러나 주인 아줌마는 남의 속도 모르고 즐겁고 훈훈한 공상에 구정물을 끼얹는 것 같은 소리를 했다. 밑도 끝도 없이 푸듯이
"쯧쯧, 네 에미년은 죽일 년이다. 죽일 년이고 말고."
어머니는 몇 달 전에 이미 죽었고, 주인 아줌마는 누구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터인데도 그걸 욕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제일 먼저 달려 와 준 이 아줌마는 이런 몹쓸 년 봤나, 이런 죽일 년 봤나, 하고 치를 떨었다. 아줌마는 우리가 지독하게 가난해진 후에도 우리와 왕래하던 어머니의 단 하나의 친구였고, 어머니의 허영을 어느 만큼은 이해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아버지 회사가 망해서 아버지가 머리가 허연 나이에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실직했을 때 어머니가 앞으로의 생활 대책을 논의했던 단 하나의 친구도 이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소식적에 과부가 되어 이것 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줌마는 우선 우리가 그 동안 한 푼의 저축도 없이 살았다는 걸 알고 어안이 벙벙해 했다. 너 그 동안 내가 태워 준 계만 해도 몇 구찐데 그 몫돈 다 어쨌느냐고 따졌다. 어머니는 조금도 풀이 죽지 않은 채, 넌 월급쟁이 생활을 몰라서 그렇지 다달이 적지 않이 적자가 나게 마련이고 곗돈으로 그 적자 메우기도 바빴었다고 발뺌을 했다. 아줌마는 너 앞으로 고생 좀 해도 싸다며 방이나 한 칸 전세나 주어서 식료품 가게나 내 보라고 일러 주었다. 다행히 집이 길목이 좋으니까 두 내외가 열심히 뛰면 생활은 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줌마 말을 따르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어엿하게 출세한 남편 갖고, 생활 기반이 확고하게 잡힌 친구들 보기 창피하게시리 어떻게 구멍가게를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사람이 한 번 본때 있게 살아 보려면 통이 크고 투기성이 있어야 하고 기회를 잘 잡아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기회라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충동질했다. 아버지가 회사에 잘 다녀 착실하게 생활을 꾸려 나갈 때도 어머니는 외출만 했다 돌아오면 신경질을 부렸었다. 남들은 수단들이 좋아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게 살림이 늘고 으리으리하게들 사는데 이 놈의 집구석은 어떻게 된 게 맨날 요 모양 요 꼴로 사는지 모르겠다고, 아버지를 상전이 하인 들볶듯 들볶아쳤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버지의 실직이 아버지가 쩨쩨한 월급쟁이 생활을 면하고 통이 큰 사업가가 될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수억 대를 가지고 있다는 부자 친구네를 뻔질나게 드나들더니 드디어 집을 담보로 목돈을 빌릴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이런 내조에 힘입어 아버지는 사무실을 얻고, 전화 놓고 회전의자 돌리고, 급사도 두고 사장 노릇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버니 회사에 전화 걸기를 좋아했다. 응, 미스 최야? 여기 사장님 댁인데 사장님 좀 바꿔 줘, 그 소리를 하고 싶어 못 살아 했다. 그러나 미처 그 소리에 사모님다운 가락이 붙기도 전에 회사는 망하고 집까지 내쫓겼다. 저당권 설정하고 빌린 돈을 이자도 원금도 한 푼도 안 갚았으니 명의가 이전되고 내쫓기는 건 당연한 결과라는 거였다. 그 밖에도 조금씩 얻어다 쓴 푼돈 때문에 세간살이까지 돈 될 만한 건 다 빼앗겼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부자 친구한테 네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고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대들었지만 모든 것이 그 친구의 뜻대로 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어머니의 그 부자 친구가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래도 그 친구는 우리를 거리로 내쫓지 않고 전셋방을 하나 얻어 주었다. 너는 고생해 싸지만 네 자식들이 불쌍해서 베푸는 동정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어머니의 친구들은 인형 옷 만드는 집 아줌마거느 수억 대를 주무르는 부자 친구건 모두 어머니에게 고생을 해서 싸다고 그랬었다. 그러나 죽어도 싸다곤 안 그랬었다.
어머니는 전셋방에 나앉은 후에도 도저히 자식들 공부를 계속 시킬 수가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다. 세상에, 개 돼지도 아니고 인두겁을 쓴 사람으로서 어떻게 자식 대학 공부를 안 시키겠느냐고 철없이 설쳤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어디 가서 한 푼이라도 벌어 올 궁리는 안 하고 그저 공부 공부 하면서 전셋돈을 빼다가 오빠들 삼류 대학 등록금 하고, 내 고등학교 등록금 하고, 그러곤 사글세방으로 옮겨 앉았다. 그러나 학교고 뭐고 다 고만 둬야 할 날은 어김 없이 왔고, 기어이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사천 원인 산동네까지 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우리가 알거지가 됐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고리타분하고 시척지근한 가난의 냄새에 발작적으로 진저리를 쳤고, 가난한 사람들의 끈질긴 생활력을 더러운 짐승처럼 징그러워했고, 끝내 가난뱅이하곤 상종을 안 했다. 아무리 없는 것들이기로서니 아무리 상것들이기로서니 인두겁을 쓰고 어떻게 이런 굴 속 같은 방에서 이렇게 비위생적으로, 이런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살 수 있을까 하고 흉을 보았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우리 살림을 제일 더럽게 해서 우리 쪽마루엔 설음질도 안 한 그릇들이 다음 끼니 때까지 그대로 헤벌려져 있어 온 동네 파리가 살 판 난 듯 엉겨 붙게 내버려 두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가난에 길들여지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것이다.
 
인형 옷 만드는 집 아줌마가 어머니에게 자기 집에 와서 그 일이라도 거들어서 새끼들 굶기지는 않아야 할 것 아니냐고 몇 번이나 권하다 못해 나한테 너라도 나와 보지 않으련 했다. 나는 얼씨구 하고 거기 나가서 그 앙증한 옷을 만드는 일을 배웠다. 그 일은 재봉틀이나 노릴 줄 알면 되는, 기술이랄 것도 없는 쉬운 일이었다. 내가 하는 것을 며칠 지켜 보던 아줌마는 한 달에 만 원씩 주마고 했다. 너니까 너희 식구 살려 주는 셈 치고 특별히 후하게 준다는 거였다. 그 날 나는 그 소식으로 식구를 즐겁게 하고 싶어 한달음으로 집으로 달려 왔다. 만 원이라야 집세 빼면 다섯 식구 쌀 값도 안 떨어질 푼돈이었지만, 식구 중 제일 어린 내가 만 원을 벌 수 있으니 식구가 다 발 벗고, 체면치레도 벗고 나서면 제가끔 만 원씩이야 못 벌어 들일까 싶었다.
합심하면 살 수 있어요. 이 동네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사니까 창피할 것 하나도 없어요. 아이들도 벌고 어른들도 벌고 노인들도 벌고,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살고들 있어요. 텔레비전 놓고 사는 집도 있고, 며칠에 한 번씩 돼지고기 구워 먹으면서 사는 집도 있고 아무튼 시끌시끌 노래도 부르고 낄낄낄 웃기도 하며 살고 있어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요, 네. 우리 식군 노인도 없고 아이도 없고 다 벌 수 있잖아요. 서로 기대지 않고 다 나가서 벌면 못 살 것도 없단 말예요. 나는 이렇게 열심히 식구들을 부추겼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냐 우리가 너한테 기댈까 봐, 안 기댄다 안 기대 두고 보렴 하더니 그 다음 날 내가 공장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식구는 죽어 있었다. 가을이라곤 하지만 노염이 가시지 않은 무더운 날,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문틈은 꼭꼭 봉하고 네 식구가 나란히 죽어 있었다.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죽어 있었다.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무리 늦어도 시장에 들르는 게 내가 상훈이하고 함께 살게 된 후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생선 가게 앞에서 나는 대구와 도미를 구경했다. 생선은 아무리 점잖은 고급 생선이라도 눈 뜨고 죽는다고 아침에 상훈이한테 장담했지만 어째 좀 어정쩡해서 다시 확인해 봤다. 모든 생선이 해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좌판에 누워 있었다. 생선은 눈은 있어도 눈꺼풀이 없겠거니 싶자 웃음이 쿡쿡 치밀었다. 나는 짜게 절인 고등어를 한 손 샀다. 고등어란 놈을 연탄불에 얹어서 구우려면 기름이 많은 놈이라 연기도 몹시 나겠지만 냄새도 지독할 게다. 아마 터널 속 같은 여섯 식구 공동의 부엌을 짜고 비린 고등어 굽는 냄새로 꽉 채울 게다. 나는 의기양양해서 산동네를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상훈이는 먼저 와 있었으면서 아무 것도 안 해 놓고 벌렁 누워 있었다.
"먼저 온 사람이 밥해 놓기로 했잖아."
상훈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담배만 한 개비 꼬나 물었다.
"너 정말 이러기야. 네가 날 부려 먹을려면, 네가 날 먹여 살려얄 게 아냐. 안 그래. 누가 누구 덕 보려고 같이 사는 거 아니잖아."
우리 생활비를 서로 공평하게 반분해서 부담하고 있으니만큼 가사에 소모하는 노동력도 그러기로 했던 것인데 암만 해도 노동력에선 내가 밑지고 있는 것 같아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좀 내버려 둬."
상훈이는 풀이 죽어 있었다. 슬픔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왜 공장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나는 대번에 상냥해지고 말았다.
"만식이, 그치가 오늘 기어코 공장에서 피를 토했잖아."
"어머머, 그럼 걔가 정말 폐병쟁이였구나.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나는 만식이를 만난 일은 없지만 상훈이한테서 창백하고 늘 밭은 기침을 콜록콜록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폐병쟁이 같다고 같이 점심 먹을 때가 제일 기분 나쁘다고 했었다.
"별안간 각혈을 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지니까 주인은 송장 치게 될까 봐 겁이 나는지 빨리 집에 업어다 주라고 괜히 우리들만 갖고 호통을 치잖아. 그래서 업어다 주고 주인이 준 돈도 전해 주고 그러고 왔지 뭐."
"주인이 돈을 얼마나 주었는데."
"얼만 얼마야, 어제까지 일한 거 일당으로 쳐 줬지."
"깍쟁이 자식. 그건 그렇고, 그래 너희들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보고만 있잖으면 어떡해?"
"친구가 그 꼴이 됐는데도 같이 일하던 공장 친구들이 보고만 있었던 말이지. 그러고도 마음이 편하단 말이지? 그러면 못 써. 뭐니뭐니 해도 어려울 땐 어려운 사람들끼리 도와야지, 그러면 못 쓴다구."
상훈이는 그래도 내 말을 못 알아 듣고 어리둥절해 했다. 그럴 때의 그는 몹시 아둔하고 맹추스러워 보였다. 가난뱅이답지 않게 수려한 이목구비도 백치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맹렬한 저항을 느꼈다. 그래서 와락 짜증을 내면서 없는 사람끼리 그러면 못 쓴다고 돈을 추렴해 가지고 문병 가서 가족을 위로하고 특히 본인에겐 곧 나을 테니 걱정 말고 몸조리나 잘 하라고 거짓말을 시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죽을 때까지 가끔 가끔 그렇게 해 줘야 된다고 타일렀다. 죽을 때까지라면 한 없이 긴 동안 같지만 각혈을 했다니 살면 얼마나 살랴, 나는 처연한 기분으로 그런 계산까지 했다.
우리는 맛없게 저녁을 먹고, 말없이 뜨악하게 앉았다가 자리에 들었다. 외풍이 센 방에선 그저 눕는 게 제일이었다. 이불 밖으로 코를 내놓으면 코 끝이 시리게 외풍이 세고 방바닥이라야 겨우 냉기가 가신 방에서 우린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밀착시켰다. 그리고 한 이불 속에 든 남녀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짓을 하면서도 나는 이게 아닌데, 아아,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다. 그건 우리가 둘 다 서로 그 방면에 풋내기라는 데서 오는 초조감하곤 달랐다. 나는 그 짓을 통해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느낌이 되길 바랐지만 정반대의 느낌으로 끝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억지로 참았다. 나는 행복했던 적에도 울기 잘 하는 계집애였어서 울고 난 후에 모든 것이 씻겨 내린 듯한 상쾌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모든 것을 씻겨 낸 후의 내 모습을 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침에 나는 우리 공동의 예금 통장을 상훈이에게 주면서, 돈을 거두려면 먼저 그 주동자가 선뜻 돈을 내놓고 나서 남에게 손을 벌리는 게 순서이고, 그렇게 해야 일이 쉬울 거라고 알려 줬다. 얼마 간이라도 걷히는 대로 빨리 갖다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공장에 나와서도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로 온종일 마음이 흐뭇했다. 내가 살고도 남아 남을 돕는다. 생각만 해도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밤에 집에 돌아온 나는 기절을 할 만큼 놀랄 밖에 없었다. 예금 통장에 잔고가 한 푼도 남아 있지를 않았다. 몽땅 털어 폐병쟁이한테 갖다 줬다는 거였다. 삼만 원이 넘는 돈을 몽땅, 그게 어떤 돈이라고.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고 나 역시 미치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하게 됐어. 그렇지만 말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누구한테 돈을 걷니? 다 말도 못하게 지독한 가난뱅이들 뿐인걸."
"뭐라구, 모두 가난뱅이들 뿐이라구? 그럼 우린 뭐니? 우린 부자니 응? 우린 부자야?"
나는 내 분을 내가 이기지 못해 그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다가 골통을 벽에다 콩콩 부딪쳐 주었다. 그래도 그는 태평스레 히죽히죽 웃었다. 그는 삼만여 원 중 반이 넘는 돈이 자기 돈인데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 폐병쟁이를 뼈 아프게 동정했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안다. 둘 다 그에겐 조금도 절실하지 않았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도와주고 싶은데 돈은 아깝고, 그래서 돈을 꺼냈다 넣었다, 이천 원을 내놓을까, 삼천 원을 내놓을까, 천 원 상관으로 십 분도 넘어 괴로워하고 도와줄까 말까로 한 시간도 넘어 애타심과 이기심이 투쟁을 하는 그 뼈 아픈 갈등을 전연 겪지 않고, 헌신짝 버리듯 무심히 삼만여 원을 그냥 버렸던 것이다. 그걸 깨닫자 나는 오한처럼 오싹 기분 나쁜 불안감을 느꼈다.
"넌 뭐니. 넌 뭐야? 이 새끼야. 넌 부자니, 부자야?"
나는 불안을 털어 버리려고 다시 악을 썼지만 그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나는 제풀에 지쳤다. 나는 기진맥진 지칠 대로 지쳤는데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는데 그는 곧 잠들었다. 나는 수명이 다 돼 침침한 이십 촉 짜리 형광등 밑에서 그의 자는 얼굴을 곰곰이 들여다 보았다. 도대체 넌 뭐냐? 삼만 원이 넘는 돈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편히 잠들 수 있는 너는 뭐냐. 기가 죽지 않는 건 좋다고 치자. 그렇지만 너의 그건 가난뱅이들의 억척스럽고 모진 그 청청함하곤 확실히 다르다. 전연 이질적인 것이다. 나는 깊이 전율했다.
 
내가 상훈이를 만난 것은 5원 짜리 풀빵을 굽는 포장 친 구루마 앞에서였다. 나는 한 눈에 그가 그 근처에 즐비한 가내 공업 하는 공장의 직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풀빵을 먹는 꼴이 여간만 꼴불견인 게 아니었다. 손이 더럽다는 걸 지나치게 의식해서 그랬겠지만 풀빵을 맨 손으로 잡지를 않고 어디서 났는지 오돌토돌한 꽃무늬가 있는 하얀 종이 냅킨으로 싸서 집어먹고, 다 먹고 나서는 그 냅킨으로 입 언저리를 자못 점잖게 꾹꾹 눌러 닦았다. 같은 5원 짜리 풀빵을 먹으면서 그까짓 종이 한 장으로 이곳에서 풀빵을 먹고 있는 배고프고 피곤한 저녁 나절의 직공들 사이에서 우월감 같은 걸 누리고 있는 게 몹시 꼴 사납게 보였다. 그 때 나는 도시락도 못 싸 가지고 다닐 때라 배가 몹시 고팠기 때문에 풀빵을 계속해서 정신 없이 집어먹었다. 다 먹고 나서야 냅킨으로 싸서 먹던 아니꼬운 녀석이 여태껏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너 그렇게 먹고도 목 메지 않니. 어디서 차나 한 잔 사 줄까 하고 그가 수작을 붙였다. 차를 사 준다는 소리에 나는 배꼽을 움켜잡고 숨이 막히게 웃고 또 웃었다. 저 얼간이 같은 게 여자를 꼬시길 때, 다방에나 가자로 시작한다는 건 그래도 어디서 들어서 알고 있구나 싶어 그게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저하고 나하고 그 주제꼴 하며 풀빵 먹는 뱃속 하며 다방이 아랑곳인가. 그렇지만 차츰 나는 이 얼간이가 마음에 들었고, 풀빵집에서 못 만나고 마는 날은 하루를 헛 산 것 같이 허수했다. 혼자 산다고 하기에 나처럼 고아려니 했고, 그래서 같이 살자고 내 쪽에서 먼저 꼬드겼고─이것이 내가 상훈이를 알게 되고 같이 살게 된 전부였다.
폐병쟁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우리는 같이 살았지만, 나는 가끔가끔 그에게 발작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삼만 원 때문에 그를 그렇게 들볶는 척 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폐병쟁이에 대해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루하루를 편히 사는 게 가끔 미운 생각이 났고 그래서 그렇게 들볶는 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무런 예고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드디어 나는 굴욕감을 무릅쓰고 멕기 공장에 찾아가 보았다. 멕기 공장에도 안 나온다는 거였다. 주인이 나에게 무서운 소리를 했다. 어디서 사고가 나도 크게 났을 게 틀림이 없다는 거였다. 다른 데로 날으려면 월급도 당겨 쓰고 구멍가게 외상도 잔뜩 지고 날으는 법인데, 월급 셈도 안 해 가지고 없어졌으니 차에 치여 죽었든지 깡패 칼에 맞아 죽었든지 둘 중의 하나겠지 하고 자못 자신 있게 장담을 했다.
그 날 나는 별의 별 끔찍한 공상을 하며 잠을 못 잤지만 그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를 못했다. 서울 장안이 어느 만큼 크고 복잡한가 나는 그것을 제대로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채 다만 겁이 날 뿐이었다. 나는 밤마다 오그리고 새우잠을 자면서 훌쩍훌쩍 울고 아침에는 여전히 공장에 나갔다. 밥벌이를 위해서도 공장에는 나가야 했지만 공장에 나가 있는 동안 그가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꼭 돌아와 있을 것만 같은 확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믿으며, 산동네의 비탈길을 미친 듯이 달음질 치는 뜨겁고 부푼 기대의 시간을 위해서 공장에 나가는 거였다. 나는 기적이란 사람 눈에 안 띄게 몰래 일어나는 것으로 막연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 방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도 매일 방을 비워 줘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허탕을 치면서도 매일 기다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에 없었다.
 
어느 날, 내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상훈이가 돌아와 있었다. 그는 냉랭하고 남남스러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깨끗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내 방에 앉아 있는 게 아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비참하게 돼서 돌아오는 경우만 상상했지 이렇게 훌륭하게 돼서 돌아오는 경우를 전연 예기치 못했으므로 우두망찰을 했다. 잠시라도 어디로 도망갔다 다시 나타날 수 있으면 뭔가 좀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웬일이야?"
나는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 같지 않은 가래가 걸린 듯한 잠긴 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했다.
"응, 돈 갚으려고. 그 때 그게 삼만 얼마더라?"
그는 은행원처럼 친절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나는 내 속에서 꿈틀대던 정다운 것들이 영영 사라져 가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지독한 혼란이 왔다.
문득 그의 옷깃에서 빛나는 대학 배지가 눈에 띄고, 방바닥에 그의 것인 듯한 술이 두꺼운 책까지 눈에 띈다.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겁 먹은 소리로 악을 썼다.
"너 미쳤니? 너 기어코 도둑질을 했구나. 해도 왕창. 그리고 가짜 대학생 짓까지. 너 정말 미쳤니?"
그러자 그게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삼만 원 때문에 허구한 날 들볶은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더럭 겁도 났지만 심장이 찐하도록 감동했다. 그래서 나는 잔뜩 울상을 하고 그에게 안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고상하게 거부했다.
"여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도둑놈은 더구나 아냐.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실 뿐이야. 아들 자식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라는 걸 걱정하셔서 방학 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 듣겠어?"
어떻게 그걸 알아 들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어머니는 부자들이 얼마나 호강들을 하며 사나에 대해 아는 척 하기를 좋아했었다. 세상에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고, 인생의 온갖 열락이 돈 주위에 아양을 떨며 모여 든다고 했다. 그렇지만 가난뱅이 짓을 장난 삼아 해 보는 부자들에 대해선 들은 바가 없다.
"우리 아버진 좋은 분이야. 요즈음 세상에 보기 드문 분이지. 자식들에게 호강 대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하고 싶으셨던 거야. 덕택에 나는 이런 방학에 아주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경험이었어."
참 생각난다. 인형 옷 만드는 집 아줌마가 텔레비전 연속극 얘낄 하면서, 재벌의 아들이 인생 공부 삼아 물장산가 뭔가 하는 얘기를 하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리 연속극이라지만 구역질 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가난을 뭘로 알고 즈네들이 희롱을 하려고 해.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 가난한 계집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가난 그 자체를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아버진 만족하고 계셔. 내가 그 동안 지독한 생활을 잘 견딘 걸. 그래서 친구분한테도 자식들을 그렇게 고되게 키우는 걸 권하실 모양이야. 실상 요새 있는 사람들, 자식을 너무 연하게 키우거든."
맙소사. 이제부터 부자들 사회에선 가난 장난이 유행할 거란다. 기름진 영감님들이 모여 앉아, 자네 자식 거기 아직 안 보냈나? 웬걸, 지금 여권 수속 중이네. 누가 그까짓 미국 말인가, 빈민굴 말일세 하고.
"그래서 아버지가 기분 좋아하시는 낌새를 타 가지고 네 얘기를 했어. 이런저런 빈민굴의 비참한 실정을 말씀 드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슬쩍 내비쳤지. 글쎄 하룻밤에 연탄 반 장을 애끼자고 체온을 나누기 위한 남자를 한 이불 속에 끌어들이는 여자애가 다 있더라고 말야. 물론 끌려들어간 남자가 나였단 소리는 빼거. 그랬더니 아버지가 의외로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집에 데려다 잔심부름이라도 시키다가 쓸 만 하면 어디 야학이라도 보내자고 하시잖아. 좋은 기회야. 이 기회에 이런 끔찍한 생활을 청산해. 이건 끔찍할 뿐더러 부끄러운 생활이야. 연탄을 애끼기 위해 남자를 끌어들이는 생활을 너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돼."
암 부끄럽고 말고. 부끄럽다. 부끄럽다. 부끄럽다. 당장 이 몸이 수증기처럼 사라질 수 있으면 사라지고 싶게 부끄럽다. 부끄럽다.
"자 돈 여기 있어. 다시 데릴러 올 테니 옷가지라도 준비해. 당장이라도 데리고 가고 싶지만 그런 꼴로 갈 순 없잖아."
나는 돈을 받아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 치고 그리고 그럴 내쫓았다. 여섯 방의 식구들이 맨발로 뛰어나와 구경을 할 만큼 목이 터지게 악다구니를 치고 갖은 욕설을 퍼부어 그가 혼비백산 도망치게 만들었다.
"가엾게스리 미쳤구나."
그는 구두짝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도망치면서 중얼거렸지만 아마 곧 나에 대해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폐병쟁이를 잊어버리듯이 쉬 잊어버릴 것이다.
 
나는 그를 쫓아 보내고 내가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내 가난을 지켰나를 스스로 뽐내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 방은 좀 전까지의 내 방이 아니었다. 빗발로 얼룩얼룩 얼룩진 채 한 쪽이 축 처진 반자지, 군데군데 속살이 드러난 더러운 벽지, 자크가 고장 난 비닐 트렁크, 절뚝발이 날림 호마이카 상, 제 몸보다 더 큰 배터리와 서로 결박을 짓고 있는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우그러진 양은 냄비와 양은 식기들─, 이런 것들이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는데도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다만 무의미하고 추했다. 어제의 그것들은 서로 일사불란 나의 가난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들은 분해되어 추한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판잣집이 헐리고 나면 판잣집을 구성했던 나무 판대기, 슬레이트, 진흙덩이, 시멘트 벽돌, 문짝들이 무의미한 쓰레기 더미가 되듯이 내 가난을 구성했던 내 살림살이들이 무의미하고 더러운 잡동사니가 되어 거기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내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다. 나는 상훈이가 내 가난을 훔쳐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분해서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러나 내 가난을, 내 가난의 의미를 무슨 수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우리 집안의 몰락의 과정을 통해 부자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가를 알고 있는 터였다. 아흔 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 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 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나는 쓰레기 더미에 쓰레기를 더하듯이 내 방 속에, 무의미한 황폐의 한가운데 몸을 던지고 뼈가 저린 추위에 온 몸을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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