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시에는 우산을 지참하시길 바랍니다" 적힌 유치원 알림장에 , 일부 학부형들이 "우천시"는 어디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심한 사과"를 할 일이 없어 심심한 사과로 이해했다거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명징한"이란 영화평조차 어려워하다보니, 사회 전체의 문해력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학생들의 어휘수준은 한수 더 떠서, "개편하다"를 "개 편하다"로 받아들일 정도라고 한다.
8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만 해도, 국어 사전이나 옥편을 수시로 찾아봤더랬다.
물론 한문이나 국어 과목의 시수가 높았다.
무엇보다 우리 때는 심심했다.
놀거리가 없었다.
책은 더더구나 귀했다.
학기가 시작되어 교과서를 받으면 그 날밤 곧바로 달력으로 표지를 쌌다.
책이야말로 성경이었다.
책이야말로 사다리였다.
책이야말로 동앗줄이었다.
책가방과 보조 가방에 가득 책을 짊어지고 오면 부모님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모셨다.
두툼한 종이를 접어 칼로 베어 싸고 비닐로 한겹 더 싸면서, 자식들의 앞날을 축수하셨으리.
그날 밤 나는 새 교과서의 모든 시와 소설을 다 읽었다.
갈급했다.
목마른 아이처럼,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물론 설명문이나 논설문처럼 딱딱한 글까지 다 찾아 보지는 않았지만, 시 소설 수필을 미리 읽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도서관에도 책이 거의 없었고, 전집으로 파는 책을 사 보는 게 꿈이었더랬다.
아버지가 받아보시는 신문을 몰래 읽는 재미도 대단했다.
그때는 가난했기에, 가진 것이 없었기에 더 많이 더 깊이 누린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글쎄, 이렇게 풍요로운 세상에 누가 그렇게 한글자 한글자 찾아보며 씹고 또 씹어가며 읽을 것인가,
얼마나 재미있는 게 많은 세상인데,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좌절스러울 정도로 종이와, 글씨와, 글과, 책에 관심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흰 바탕에 검은 글씨를 보면서 절대적인 고독속에서 한 대화만큼 오래 기억남고 즐거운 것은 없는데,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얼굴을 부비며 아무말 없어도 마냥 좋은 순간만큼 좋은 것은 없는데,
이미 그 시절이 갔다.
그렇게 문해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일수록, 각인 효과라고 할까, 처음 배웠던 단어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악착같이 기억한다.
예컨데 "cause" 라는 단어는 하나같이 "야기하다"라고 말한다.
야기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물은 후, 현재의 언어 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니, 일으키다, 원인이 되다라고 익히자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야기하다" "야기하다"이다. 끝끝내,
따라서, 문해력을 탓하고 걱정하기 전에 우선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
우천시에는 이란 말을 고집하는 대신, "비가 오면"
심심한 사과 대신, 가슴 깊이 사과드립니다.
문해력이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이해하고자하는 의지라고 본다.
일단 세월이 바뀌었음을, 시간과 함께 기술과 문화가 너무 많이 변해버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에 맞는 말로 끊임없이 바꾸고 익혀가는 노력을 모두 기울어야 한다.
그러니까, 단어가 정말 중요하다.
나는 영어 공부란 단어가 처음이자 끝이다. 단어만 외우면 된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다보니, 단어공부가 절대적임을 인정하게 된다.
관심이 없으니 흘려듣고, 흘려들으니 증발해버리고, 그러다보니 늘 그 수준에서 머무르게 된다.
관심과 의지를 갖고 단어를 선택하여 쓰고 듣고 익히며 남들과 소통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이해해가는 것,
그것이 문해력 아니겠는가,
내가 자주 쓰는 단어를 하나하나 적어본 후, 놀랍고 부끄러웠다. 말대로 된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가난하고 얄팍하며 부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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