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저는 이 시를 보자마자, 사랑시, 연애시라고 믿었습니다.
신촌의 그 까페에서 그를 기다리던 , 나를 기다리던,
사랑했던 우리,
나의 나, 나의 너, 너의 나, 너의 나,
그렇게 넷이서 만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황지우 시인이 봉천동 살 때, 빚독촉을 받는 자리에서 쓴 시라고 합니다.
황지우 시인이, 수능 시험에 나온 자신의 시 문제를 직접 풀어보고 틀린 이야기는 유명하지요. 원작자가 풀어도 틀리는 시험 문제,
지금은 죽음을 기다리는 저 이야기 같습니다.
저는 이런 시를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글은 그대로라도, 우리는 바뀝니다.
아니. 우리가 있어서 글이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글을 통해서 우리를 드러내기도 하고, 우리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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