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 장욱진이 다녀왔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사람들은 거리를 꽁꽁 싸매고 다녔다.
나는 궁궐이 가득한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았다.
나는 한강과, 남산이 있는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았다.
나는 신혼 여행도 서울의 종이 울리는 거리로 갔다.
종이 울리는 거리, 환구단이 보이는 조선 호텔에서 그와 밤을 보냈다.
그 서울에 장욱진이 다시 찾아왔다.
십년전 서소문의 호암 미술관에서 장욱진을 만났다. 아이같은 그림이라고 했다.
동년배의 김환기도, 이중섭도, 박수근도 좋아한다. 좋아하는 한국 남자가 이렇게 많다,
김환기의 세련된 추상성, 이중섭의 뜨거운 낭만주의, 박수근의 무덤덤한 뚝심을 사랑한다.
장욱진이 다시 서울 덕수궁에 들렀다.
그는 엽서만큼이나 작은 화폭에 그림을 그렸고, 액자를 씌웠다. 액자는 때로 그림의 집이다. 잘 어울리고 편안한 그의 집이다.
그렇게 작은 그림속에 천진한 아이가 들어있다고 하던데, 물론 사실이다. 그런데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문기가 서릿발 같이 살아있다. 아주 작은 그림 속에 고독하나 청정하고, 꼿꼿한 문인이 들어있다.
산과, 새, 사람과, 나무가 그에게로 가서, 기호가 되어 타전을 한다.
그 이야기는 사적이면서 순도가 높다.
가족이란 그림은 도산서원에서 느낀 바와 닮았다.
물론 수십칸이라고 하나,낱으로는 아주 작은 방에 큰 정신과 자유가 노닐고 있었다. 어떤 크고 화려한 공간에서도 받지 못했던 기운이다. 병산 서원을 에워싼 자연의 힘일 수도 있고, "이황"이란 대석학의 아우라일 수도 있다 .
그렇게 작은 방에서, 조선 시대 치세의 근본인 성리학이 지켜져 온 것이 경이로웠다.
장욱진의 집도 꼭 그랬다. 그렇게 작고 압축적인 공간에 빼곡이 찬 가족들의 모습이 그랬다. 기와를 이은, 한칸의 집, 댓돌이 마치 집의 신발처럼 보이는 그 집에서 장욱진은 밥 먹고, 그림 그리고 사랑하고, 가족을 먹여살렸으리...
비단 장욱진 집 뿐이었으랴, 우리 모두의 집이 다 그랬다.
자고 일어나면 몇 억씩 오르고, 집을 살 수 없어 결혼 포기하게 하고, 매일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남들과 다르다며 자랑하기 바쁜, 소위 "신축 아파트" 커뮤니티 " 에 진력이 난 내게 큰 위로가 되는 그림이다.
장욱진은 내게 말했다. 괜찮아, 너도 열심히 살았어, 나도 열심히 그렸고,
아주 작은 집에서 살면서 그는 부처를 품었고, 도자기를 사랑했다.
아주 작은 집으로 장욱진은 들어갔고
나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꿇으며 그의 집에 다녀왔다.
23년 11월 17일 바람이 몹시 불었고,
덕수궁의 낙엽은 거의 다 졌다. 바닥은 어제 내린 비로, 낙엽이 가득했다.
덕수궁은 나라를 잃은 임금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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