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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s

도구의 인간 - 그대의 긴 팔로

 
국민 학교 시절 (초등학교로 바꾸면 그 맛이 살지 않아서요 ㅎ) 민방위 훈련할 때의 거리를 기억하세요? 
공습 경보 싸이렌 울린 거리에는 아무도 없이, 시간이 멈춘 듯, 적요하던 기억이요. 
 
어느 오후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아무도 없고,
지금  언제인가, 여긴 어딜까 낯설기만 했던 적 있으시죠?  
시계를 보니. 3시라 아 뜨거라, 가방 멘 채 학교 가다가, "공일인데 학교는 왜가냐"고, 지나가던 사람들과 함께 웃던 일이요. 
 
 
그런 기억처럼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까리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습니다. 
올리비아 핫세와 레오나르도 파이팅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서 며칠동안 잠도 못자고 밥도 못먹었어요.
영화 속에선가, 아니면 꿈에선가, 느닷없이  팔이 끊임없이 늘어나더니, 꽤 먼 누군가에게 편지나 먹을 것을 전해주더라고요. 
 
온 세상이 다 만류하기에 더더욱 끓어오르던 호르몬, . 서로에게 닿고자, 끝모르고 늘어나던 두 사람의 손이 영화의 주제여서였을까요? 
 
사실 전, 종이, 특히 원고지에  무언가를 쓸 때마다 희미하게 제 팔이 길어지는구나 느끼고 있었답니다. 
안에서 차고 넘치던 마음과, 생각, 이야기들을 네모 칸 안에 밀어넣는 동시에 그것들이 칸막이를 뛰어넘어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랬습니다.
나누고 싶었습니다. 
얼토당토않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지라도  상대방 손에 쥐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양손에 떡을 쥘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허기를 잠시나마 채울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수학을 오지게도 못해서일까,  빼어나게 수학 잘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죠. 
어떡하면 수학을 잘 할 수  있냐고, 수학을 왜 좋아하느냐고, 
 
"난 그냥 펜 잡고 문제를 풀다보면 손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 들어"란 대답을 듣고, 
우린 다르지만 같구나, 손이,  팔이 길어질 때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이니까 연애를 해야겠어, 
 
길어진 팔로 우린 서로를 안아, 10개월 후에는  이쁜 아이를 낳고, 
각자의 팔로, 설거지에, 빨래, 청소며 장보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30대를 보냈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다시 또 만납니다. 
팔이 옆집으로, 달음질치더니, 옆 동네를 지나,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요. 
가브리엘 마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에서요. 
그때 저는 제 팔이 다시 꿈꾸길 시작했구나,  겨드랑이가  딱딱하게 굳었지만, 간질거리며 다시 일어나고 싶구나 
 
그렇습니다. 
저는 매우 짧은 팔을 지녔습니다. 
손가락은 뭉툭하고 무디기 그지 없습니다. 
거의 모든 기계가 절 싫어하고, ㅎ 그러니, 저도 좋아할 리가 없죠. 
점점 줄어들고, 
점점 굳어가는 팔과 손을 안으로 안으로 구부리며 저는 점점 더 작아져 갑니다. 
 
또 거의 모든 새로운 물건에 관심이 없습니다. 
 
엘리베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 말이야, 
만국 박람회에 나왔다지? 엘리버이터 버튼을 누르는 최첨단 직업이 등장했다지? 
최초의 컴퓨터도 한번 생각해봐, 황당할 정도로 크고 성능은 느리고 말이야.
놀랍지 않니?
이대로라면 은하철도 999타고 기계인간의 몸을 받기 위해 행성을 여행하러 다닐 거 같애 . 
 
 
사실 저는 "요리는 장비빨, 청소는 장비빨" 그런 말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로 엄청난 물건 사들이고, 곧 버리고, 파는 대신 저는 살림살이를 비롯한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검박하게 살고 싶습니다. 
지구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거 같아서요. 곧 가라앉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그렇지만 처음으로 부싯돌을 부딪혀 불을 밝히던 인간, 
흙과 물을 섞어 그릇을 빚던 인간, 
그릇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만들던 인간,
그 그릇에 빗살을 새겨 아름답게 만들던 인간은
분명 팔이 길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 덕분에 태양을 늘리고 어둠을 뿌리치고, 뜨거움을  먹었고.
그들 덕분에 저도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긴 팔로 저를 안아주고 긴 팔로 저를 먹여주던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저도 긴 팔로 연필과 분필을 쥐고서 누군가를 먹이고 안아 키웠습니다. 
 
 

 
지금 전, 사실,
몽땅 연필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부러진 분필을 쥐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양 손에 떡을 쥐고서 그걸 나눠 먹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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