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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mphlet

붓다와 소성 전-임상진

 AI 전시회 나오는 길에 봉은사에 들렀다. 부처님 생신도 다가오는지라, 사찰은 북적이고 있었다. 

햇살에 색색의 등은 둥근 문양이 되어 바닥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코엑스 지척에 절이 있다는 건 꿈같다. 

몇 분 상관으로 AI 전시와 불교 사원을 동시에 볼 수 있다니 기적같다. 

이런 예기치 않은 일들이 우리를 살맛나게 한다. 

평지나 마찬가지인 경내를 둘러본다. 나현이의 극락 왕생을 빌며 분향했다. 가족들을 위한 기도도 잊지 않았다.

 

 

경주에는 중생을 위해 엎드려 기도하는 부처가 있다고 한다. 그 부처님과 함께 사진을 찍고,

바로 옆 기둥에는 "붓다와 소성전"이란 전시회가 선불당에 열린다는 포스터가 붙었다. 

 

선불당에 들어가니, 관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스타일의 랩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리셨다. 여성미를 극대화한 드레스로 선방에는 글쎄, 이다. 가슴을 시원하게 파고, 허리는 잘록하게, 무릎까지 오는 길이에 트임으로 언뜻언뜻 다리가 비치는데다, 저지 소재라, 편하기 그지없는 옷이다. 나도 한벌 있다. 

 

전시회 팸플릿도 거의 보지 않고, 오디오 가이드는 들은 적이 거의 없기에 관장님께서 설명해주시니 어색했다. 

 

작가 임상진의 개인사, 그의 작품 세계, 화가가 추구하는 물성과 주제 등이었다.

어린 시절 부처님의 얼굴에서 느낀 감정이 곧 나의 마음이란 말을 들었더랬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부처님의 얼굴이 인자, 자비, 두려움, 질타, 분노, 슬픔어리게 보인다고,,,

 

경주 보리암의 부처, 비구니 절에서 모셔서인지.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소박하고, 온순하다못해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거운 임을 오래도록 지고 온 사람처럼, 어딘가 눌려보였다. 이목구비 역시, 조화와 균형보다는 투박한데서 오는 친밀함이다. 

석굴암의 부처를 봤다. 석굴암의 부처님은 내 평생 직접, 4-5번 뵈었다. 남성적 부처의 대표상이라는데, 역시 영적인 힘과 조화, 자신감으로 가득한 걸작이다. 석굴암을 지워버린  불상은 그러나, 후광을 잃어버렸다. 통일 신라의 경주에 이르러 남산을 올라, 굽이굽이 깊은 골짜기를 헤매는 중생이어야 비로소 석굴암 부처의 광배가 될 수 있으리.

 

마애불처럼, 아이콘처럼, 박수근처럼 화가는 바위, 바람, 햇살, 풍화, 비손, 이끼, 녹을 부처라고 봤다. 

떨어져 나간 코, 길면서, 꼬리가 올라간 눈, 희미한 미소를 띈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내 얼굴을 떠올렸다. 

나의 표정과 자세가 어떤지 생각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관장님께 어째서 붓다와 소성이란 이름을 지으셨는지 여쭈었다. 눈이 빛나며 좋은 질문이라셨다. 

소성이 작은 성스러움이란 뜻도 되지만, 도자기를 굽는다는 뜻이기에 택하셨다고 한다. 

 

분명 나처럼 문학을 공부하거나 사랑하는 분일듯,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 반갑기도 하고, 때로는 애잔한 마음도 든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렸다. 그만큼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이 많았던 탓이다. 당시 자기를 굽는 기술이 없었던 일본에서는 질그릇과 목기를 주로 사용했고, 도자기로 만든 다완 하나는 성채 하나와도 맞먹는 값이었다. 다도茶道가 귀족들 사이에 최고급 취미로 유행하면서, 도자기로 만든 다완은 그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최고의 예술품이었다.

일본으로 잡혀 간 수천명의 조선 도공들 중 이삼평李三平은 일본에서 '도자기의 시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당시 나베시마(현재의 사가현) 번주에게 끌려온 이삼평은 번주의 명으로 3년간 찾아 헤맨 끝에 고령토를 발견했다. 그는 광산 건너 골짜기에 가마를 짓고 1616년, 일본 최초의 백자를 만들어냈다. 이 해가 바로 일본 도자기의 원년이다. 이렇게 시작된 일본 도자기는 점차 발전해 17세기 초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삼평이 처음 도자기를 만든 곳은 현재 사가현 아리타시 동쪽 이즈미산 부근이다. 하지만 나베시마번의 영주는 우수한 도자기 기술을 독점하기 위해 조선 도공들과 가마를 첩첩산으로 둘러싸인 오카와치산으로 이주시켰다. 조선 도공들은 엄중한 감시 속에 일본 귀족들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도자기 '이마리야끼(도자기)'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점차 일반에도 유통됐고, 유럽에도 수출됐다. 이때부터 일본은 도자기의 나라로 '신비한 동양'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조선의 도자기 공법에 그들만의 채색기법을 개발해 접목했고, 조선의 도공들을 사무라이와 동급으로 대우했다. 이 때문에 아예 일본 성으로 바꾸고 정착해 살아간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오카와치 산골짜기에는 여전히 30여 개의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기자 에몬 다완, 나와사키 다완 같은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와, 분청사기, 해주 백자, 청화백자들이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성전이다. 

 

나는 그 그릇들에서,  내 혈관. 뼈, 내 몸 속을 봤다. 그러니까, 묵고, 낡고, 맺히고, 응어리지고, 흘러내리다 굳고, 금가다 간신히 이어붙고, 

 

시간의 흐름을 마니에르로 잡아보려는 듯 했다. 

도자기, 사진, 그림이란 물성을 이용해서 시간을 잡아보려는 몸짓을 보고 왔다. 

 

부산 출신의 화가가 전시회장 들어섰을 때, 난 프랑스에서 관광온 모녀에게 그림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녀가, 진지한 태도로 우리 절과 그림을 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관장님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셨다고 했고, 젊은이는 모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안단다. 

봉은사의 선방은 한국어와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로 가득했고, 부처님은 미소짓고, 도자기는 아마도, 귀를 열어두었겠지. ㅎ

 

임상진 작가께 부처를 보며 내 얼굴을 생각했다고 전했다. 그는 웃기만 했다. 

관장님은 나더러, 화가냐고, 예술가냐고 묻는다.

작가냐고, 가끔 무용수냐고도 듣는다.

한번도 영어 선생이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내 직업을 맞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난 변장, 위장에 성공한 셈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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