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어머니는 키도 체구도 작으시나, 손이 무지 크시다.
얼마나 손이 크신지.
그 커다란 손으로 엄청난 물건들을 주시며 나를 잡아보려하셨다. ㅎ
나는 정리에 젬병인데다,
물건에 대한 욕심도 없고,
무엇보다, 내 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싶었다.
누군가 미리 계획하고 앞서서, 준비한 생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게 뭐든 잔뜩 주시려는 어머님과 아주 오랫동안 갈등했다.
아주 가끔 내가 어머님께 주십사 부탁하는 것도 있었다.
그 중 하나,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그림이 있는 달력이었다.
어느 해인가, 녹십자에서 나온 달력에 김창열의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어머님께 저 달력을 꼭 갖고 싶다고 말씀드려 받았다.
그해가 다가도록 나는 12개의 물방울을 보면서 보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제게 그 물방울들을 선뜻 주셔서요.
김창열 화가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득달같이 갤러리 현대를 찾았다.
역시 기대를 접어야 한다.
내가 알던 물방울이 아니었다.
벽, 캔버스, 종이, 바닥을 겨우겨우 맺힌 물방울이 아니었다.
보석처럼 빛나고, 영롱하며, 값져보였다. 무겁고, 느끼했다.
내 기억속에서는 누수처럼, 감전처럼, 겨우겨우 존재하는 것들이었는데,..
한지로 된 문짝에 달린 구슬은 내 마음에도 맺혔고,
아주 오랫동안 그의 작품들을 공들여 감상하는 젊은이들은 기억속 물방울을 닮았다.
못내 아쉬워 바로 옆, 현대 미술관의 리성자, 김환기, 유영국 전도 들렀다.
리성자는 1918년생 여성 화가인데 RHEE Suend Ja 라고 이름을 적었다. 어찌나 신선하던지. 무려 1960년대에 그림에서조차 그렇게 사인을 했다. 프랑스에서 활동했다니, 불어식 발음을 위해 썼을 수도 있으나, Lee Sung Ja 라고 쓰지 않았다.
나무를 수액의 길로 그린 것도 좋고,
김환기는 김환기는 김환기는 무슨 말이 필요할까
겨울 아침, 하늘을 다시 봤다. 갤러리 현대는 환기 미술관 못지 않게 환기를 제대로 모실 줄 안다.
환기는 환기는 다시 보고, 또 볼수록 더 좋다. 가슴이 뛴다. 환기도 물방을 그렸다.
김창열도 물방울을 그렸으나, 환기의 물방울은 훨씬 더 깊고 푸르다.
유영국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울진 출신이라, 오지의 산을 그렸다는데, 그 색과 추상성이 압도적이라는데 이번에도 이해불가
대신 붉고 자주빛, 보라빛의 화면을 보면서 색의 조합만으로도 시가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저런 색의 조합으로 옷을 입고 다녀야지. 무지 튀겠네, 뭐 그런 잡생각하며 봤다.
내게 갤러리 현대는 박수근의 산실이다.
내게 갤러리 현대는 박완서의 "나목"이 시작된 곳이다.
내게 갤러리 현대는 환기를 바흐에 함께 들려준 곳이다.
#갤러리 현대#김창열#영롱함을넘어서#유영국#김환기#이성자#박수근#박완서#나목#물방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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