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 Park!
안녕하세요? 제가 처음 뵌지 40년이 넘었네요? 40년만에 갑자기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박씨 부인"전이란 책에서 뵈었습니다. 허물을 벗고, 도술을 부려 적을 물리치고, 등등, 전래 동화에서 만난 위인들과 달랐어요. 뭔가 달라 보인다는 건, 그건 관심이고, 그건 사랑 아닐까요? 그러다가, 전 당신을 오래도록 잊고 지냈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박여사. 박 언니, 박 자매. 사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남편의 지위에 따라, 층위를 둔 것같은 여사도,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만 쓰고 싶은 언니도, 가족을 넘어 종교에서도 두루 쓰이는 자매 역시 딱 맞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Park라고 하겠습니다. 박달 나무 일까, 밝음 일까, 밖일까,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그..
공주의 내복,
조카들이 인형 놀이를 한다. 금발머리에 9등신 몸매 바비 인형에게 드레스, 정장, 작업복을 입혀보며, 이런 저런 역할 놀이에 여념이 없다. 하이힐, 가방, 부채, 모자, 각종 장신구 등등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게 오밀조밀 작으면서도, 디테일이 살아있다. 이번에는 공주에게 내복을 갈아 입히겠단다. ㅎㅎㅎㅎ 아니, 공주가 왜 내복을 입겠어? 왕의 딸인 공주가, 속옷도 아니고, 방한용 내복을? 내복이란 추위에 덧입는 실용 의류이다. 아니 그야말로 생존템이다. 천 개 정도의 방이 있는 궁전에서 나고 자라, 제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공주가, 두터운 내복을 입다니. ㅋㅋ 내가 아는 공주들은 잔뜩 부플린 치마를 입고, 드높이 올려 휘황한 머리를 하고서, 화사한 화장에 레이스와 비단으로오묘한 빛을 냈다. 앙징..
구의역, 샌드위치의 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시를 읽는다. 플랫폼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며 고려 가요, 조선 시조, 현대 시, 시민 공모 수상작들을 읽는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 지하철에 아름다운 한글로 된 시가 더해졌다. 가끔 좋아하는 시나, 새로운 시를 만나면, 운수 좋은 날이 따로 없다. 구의 역 전동차 플랫폼에서 시를 읽어가다가 샌드위치를 본 적이 있다. "천천히 먹어"라 적힌 포스트 잇까지 붙어 있었다. 몇 년전 점심 먹을 새도 없이 일하던, 20살 청년이 선 채로, 밥 먹다가, 그만, 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를 기리던 누군가, 구의역 지하철 역사에 놓아둔 것이다. 그 옆에 조화, 김밥, 그리고 과자 같은 먹거리들이 꽤 많이 쌓여있었다. 그 청년을 기리며 사람들이 시를 써서 붙여 두었다. 천천히 먹어, ..
해변의 묘지
평생 어머니 말을 듣지 않다가, 뉘우친 청개구리들은 유언대로 해변가에 어머니를 묻고, 물이 불어 떠내려갈까, 개굴개굴 운단다. 남쪽 바닷가가 고향인 나는 명절마다, 바닷가 묘지를 찾아 간다. 서울서 나고 자란 이들도 나처럼 돌아갈 고향이, 돌아갈 바닷가, 개골개골 떠나가라 울어옐 묘지가 있을런지. 나는 봄 가을, 바다로 돌아가 무덤를 찾아 헤맨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 애나벨리, 혹은 그녀를 잃은 연인의 묘지 헤어질 결심의 서래가 묻힌 곳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많지만, 지난 가을, 부곡의 아버지 성묘 드린 후, 봉하 마을을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모신 곳.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129번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노란 바람개비를 날리며 사람들이 전..
자두가 데굴데굴,
10월 어느날 버스를 탔다. 빈 자리가 있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다. 바닥엔 자두, 그 중에서도 늠름하게 잘 생긴 후무사 하나가 굴러다녔다. 버스 운전석에서 하차하는 데까지, 좌석 아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늦여름 가을이 오기 전 하나쯤은 먹던 후무사를 올해는 그냥 지나치나 했는데, 여기서 보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자두가 굴러다녔다. 버스 안 누구도 자두에게 관심이 없었다. 처음엔 나도 바라 보다가,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자두를 계속 이리 저리 흔들리기만 하고, 마침내 나는 허리를 구부려 자두를 주웠다. 한 알의 자두, 비현실적이었고, 돌연했고 존재감이 뚜렸했으며, 선물이었다. 내게. 버스 안에 자두 한 알이 떨어짐으로 모든 것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와 자두를 책상위에 얹어놨다. 그..
echo에게,
안녕? 마지막으로 널 만난 게 언제였더라, 널 찾으려면, 너 대신 eco가 튀어나와, ㅎ 사실 닮긴 했어, 그 애 이름도 "집"이니까, 네 이름은 "목소리"를 뜻하잖아. 산이나 동굴이 네 집이라지? 어릴 적 널 만나기 위해 산에 올라 "야호"라고 큰 소리로 외쳤단다. 그럼 너도 "야호"라고 대답해줬어. 너 엄청난 수다쟁이였다며, 제우스가 바람피우다 들키자 도망갈 시간 벌어주려, 헤라 아줌마 붙잡고 넋이 빠지도록 이야기했다면서? 그러다, 자기 남편을 단도리 못한 분을 네게 풀었다지. 스스로 먼저 말을 할 수 없고, 남의 말을 끝까지 듣고서 마지막 말만 따라할 수 있게 만들었다지. 너처럼 천상 이야기꾼이 받은 형벌도 모자라, 나르시스를 짝사랑하게 되었다지. 흠모하는 나르시스를 뒤쫒다 "누구 있나요 여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