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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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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왼쪽으로 , 위에서 아래로 넘는다. "누구나의 일생" 마스다 미리의 만화코로나 시절이야기이다. 그때도 난 일생일대 기회일거라 생각했다.늙어가는 지금도 대단한 기회일거라 믿는다.지구상에 세균이 번져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외출 금지에 비행기마저 발이 묶여서 어딘가로 가면 2주간 격리했다가 일보고 다시 귀국해서 또 2주간 격리해야 했던 여행은 꿈도 꿀 수 없고, 외식이며, 모임 모두가 제한되었던 시절, 그 당시 우리 모두 집에 갇혀  먹고, 일하고 자느라, 살이 포동포동 올랐다. 배민같은 온라인 시장이 급 성장하고, 학교가 급속하게  권위를 잃기 시작했다.  QR 코드로 우리의 동선이   다 추적되고, 우리의 공공의료가 빛을 발하기도 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메가 폴리스가 생길 때마다 이런 대재앙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마스크를 써야 하..
인문학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처럼. 30년전, 헨리 8세와 천일의 앤, 앤 블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그려진. norton Anthology of English Literature를 들고 다녔다. 영어 영문학과의 교과서였다. 습자지 처럼 얇은 종이가 수백장 엮인 아주 두툼한 책이었다. 과 친구들은 마분지처럼 두툼한 종이로 박스를 만들어 싸서 들고 다녔다. 그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학교를 오가며 으쓱했더랬다. 이화 대학 영어 영문학과 학생이란 건 엄청난 자부심이었으니까, 그 책 표지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철의 여인, 엘리자베스 여왕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무적함대를 물리친 군주, 그녀는 왼쪽을 바라보며 허리를 잔뜩 죄고, 턱 끝까지 바짝 올리고, 팔과 어깨를 과장해 부풀린 채, 갖가지, 보석과, 모피로, 벨벳으로 호화..
한번쯤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까 언제쯤일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여오겠지 시간은 자꾸 가는데 집에는 다 와가는데 왜 이렇게 망설일까, 나는 기다리는데, 뒤돌아보고 싶지만 손짓도 하고 싶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기다려봐야지.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가, 언제쯤일까, 겁먹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겠지 시간은 자꾸가는데 집에는 다왔을텐데 왜 이렇게 앞만보며 남의 애를 태우나, 말한번 붙여봤으면 손 한번 잡아봤으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으면, 24번째 결혼 기념일에 송창식의 "한번쯤"을 들었다. 송창식, 함춘호 듀엣 연주, 김광석 버전 으로, "한번쯤"을 열번쯤 들었다. ㅎㅎ 전날 남편이 출장가는 바람에 현우랑 둘이서, 워커힐가려 했다, 아차산에서 봄이 오는 한강 보면서, .맛있는 거 먹어야지. ..
안과 않 어떤 말을 해도 어떤 글을 써도 가타부타 말없는 친구가, 3번 연속, 맞춤법을 지적하며 고쳐주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어제는 신경쓰였다. 맞아, 나도, 철자나 맞춤법 어긋나면 눈에 거슬릴 때도 있었지. 심하면 내용을 보기도 전에 상대를 낮춰 잡아 보기도 했었어. 안과 않을 찾아봤다. 아니의 준말이고, 아니ㅎ의 준말이란다. 안은 앞에 쓰이고 않은 -지의 뒤에 쓰인단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이라 믿을 수 없다. 믿어선 안된다. ㅎㅎ 국어 사전을 찾아봐야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오른발, 왼발 하나하나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 잘 늙을 수 있다.
모스크바의 신사, 나발니 사망 "나발니"의 사망소식을 듣고선, "모스크바의 신사"를 계속 읽을 수가 없다. Amor Towles는 "A Gentleman in Moscow" 에서 메트로폴 호텔에 평생 가택 연급된 구러시아 귀족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를 그렸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시대의 변화, 물리적 공간의 제약에 지혜와 긍지로 적응해가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삶에서 아름다움과 목적을 발견해냈다. 몇년이 지나 다시 봐도 대단하지만, 뭔가 불편하다. 미국의 낙관주의와 회복 탄력성이 작가가 평생 누린 풍요와 만나, 하필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와인, 캐비어 등의 미식과 고가구, 결투와, 맞춤 정장, 세련된 매너와 교양이 오히려 불편하고 겉돈다. 지극히 연극적이라 , 현실감이 떨어진다. 정치하여 값 비싼 물건들을 옥션에서 구경하는 기분마저 ..
시어머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요. 명절 후 음력 정월 나흘이시라, 평생, 제대로 축하를 못받으셨다는데, 이제는 어머님의 부모님도 형제 자매도 다 세상을 뜨고 아버님도 소천하시고, 홀로 남으셨단다. 막내 아들의 식당에서, 사돈 식구들 다 초대해서, 생일을 축하해드렸다. 시간 내서 멀리 찾아주고, 더 큰 소리로 박수치고 노래해준 나의 가족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다가 1900년대 ㅎ삼성여고를 졸업했다. 산등성에 올라 감천항이 보이는 삼성여고, 공부 잘하고, 기가 센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삼성여고, 그 당시 40대였던 선생님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얼라들"이라 그저 맑고 아기같다. 신기한 게 그때 아이들 얼굴이 다 기억난다. 이름도 꽤 많이 생각나고, 아직 내 얼굴은 차마 보지 못했다. 그 애들 중 상당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애들을 우연히 만나도 더이상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래된 사진첩을 다시 찾아 보는 일은 뭐랄까, 계곡물 근처 돌을 드러내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돌을 들어 올렸더니, 수많은 조그만 벌레들이 혼비백산 사방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숨어 느긋하게 살던 벌레들이 갑작스레 조명을 받고서 놀라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을 보는 것..
오빠가 돌아왔다. 중년 부부가, 서로 존대하며 "여보" "당신"이라고 칭하는 모습은 보기 좋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도 보기 좋다. 허물없이 편하지만, 서로를 깍듯이 대접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부럽다. 한데 남편을 그냥 "아빠"라고 부를 때는 좀 어색하다. 누구의 아빠란 뜻일까, 자신의 아빠인가, 자식들의 아빠인가, 그렇지만,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서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여인은 어쩐지 귀엽다. 대학 시절,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는게 원칙이었으나, 나는 꿋꿋이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생각" 란 동요도 즐겨 불렀다. 남동생을 바래던 집안의 세 자매 중 첫째라 오빠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오빠를 남편으로도 꿈꿨다. 2-3살은 손위였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보같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