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을 들으며 걷다,
눈이 푸지게 내렸다. 눈을 맞으며 걸었다.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걷다가, 아니야, 눈 소리를 들어야지 싶어, 이어폰을 뺐다. 눈이 내리는 소리, 눈이 날리는 소리, 눈이 쌓이는 소리, 눈이 녹는 소리, 눈이 바스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다시 임윤찬의 연주를 들으며 걸었다. 반클라이번 콩쿨 우승 후, 그는 "우륵의 ‘애절하지만 슬프지 않은(哀而不悲)’ 가야금 뜯는 소리를 상상하면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고 답했다. 콩쿠르 파이널인 이 곡을 “어떤 울분을 토한 다음에 갑자기 나타나는 어떤 우륵 선생의 어떤 가야금 뜯는 소리가, 그런 부분이 있는데, 모든 것을 초월한 상태에 대한 이야기(로 담아냈다)”라고 했다. 18살 소년, 임윤찬은 우륵의 "애이불비"로 피아노를 풀어냈다..
빵굽는 타자기
운동하러 다니는 건물 1층에는 빵가게가 있다. 필라테스 마치고 지나가는 길, 빵 냄새는 얼마나 유혹적인지. 방금 구워낸 빵에서는, 아가처럼, 고소하고 향긋하며 달큰한 냄새가 난다. 뜨거운 커피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 녹아 사라질 맛이리라, 모든 것을 다 잊고 오직 지금에만 몰두할 맛이리라, 비라도 내리면, 열이 밀가루, 버터, 우유를 부풀려 구워낸 향이 더욱 짙어진다. 소공녀 세라처럼, 성냥 팔이 소녀 처럼, 빵가게 진열 유리창에 매달려 한참동안 바라보기만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그토록 먹고 싶어한 "흰빵"처럼 절하게 바라본다 우리로 치자면, 늘 꽁보리밥만 먹었으니 흰 쌀밥 먹는게 소원이었겠지. 하이디도 얼마든 살 수있는데, 아니 가게 빵들 다 살 수 도 있지만, 일년에 몇 번, 무슨 기념일이나 ..
길상사의 목소리
10년만에 길상사에 갔다. 해가 떨어지긴 전, 11월이 오기 전, 겨울이 오기 전 길상사를 보고 싶었다. 삼각산 길상사에 들러 성모 마리아를 닮은 보살님을 만났다. 극락전을 지나쳐 진영각으로 갔다. 법정 스님께서 하루도 주무시지 않으셨다는 거처, 참 진. 그림자 영 벌써 사위는 어둑신했으나 온돌 바닥은 따끈했다. 맨 중앙의 스님 영정은, 그 분을 잘 모르고, 그 분을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가 그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신, 스님께서 평생 기워 입으신 저고리 행장이 반갑다. 세수 대야, 의자, 탁발, 세면 도구, 원고지... 음악을 즐기셔 들으시다 이또한 집착이라 하여 몇 번씩 던져 부셨다는 라디오, 그 모든 것들이 귀하디 귀하다 스님의 글씨는 힘차고 단정하며 거침없이 자유로우나, 옹이가 져있다. ..
간장 종재기 속 물고기-방의걸 전시회
새색시였을 때부터 예술의 전당 앞 ㅇㄱ아파트를 점찍었다. 이유는, 예술의 전당과 가깝다는 것, 그리고 숲이 우거졌다는 것, 해지는 여름 저녁, 슬슬 걸어나가 야외 무대 공연 서서 보고 돌아오는 노년을 꿈꿨다. 나는 공연장에서 파는 샌드위치를 보면 아직도 설렌다. 열심히 일하고, 바쁜 시간 쪼개서 극장으로 달려가, 선 채로 샌드위치 먹은 후,발레를, 오페라를, 연극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꿈꿨고 난 이루었다. 열망은 결정이 된다.. 서예 박물관에서 방의걸 "생성의 결, 시간을 담은 빛"이란 전시회를 한다. 제목이 너무 거창해서 볼 마음이 없었다. 새마을 운동 본부장의 축사같아서, 그런데 무료라서, 그리고 화백의 글이 나를 사로 잡아서 보러갔다. 미대를 지망했을 때, 내 아버님 말씀... "세상에 큰 일, ..
세모의 명동 성당-
해는 일 달은 월, 두 글자가, 모여서, 밝을 명이 되었다. 그러니까, 명동은 은성한 불빛의 동네다. 세모에 명동나들이를 했다. 그곳은 여러 얼굴들로 빛나고 있었다. 중동, 동남아, 유럽, 아프리카 등등 온 세계인들이 그득했다. 갖가지 외국어가 뒤섞여 들려, 마치 로마에 온 듯했고, 런던같았으며 파리인 줄 알았다. 길을 잃을까, 소매치기를 당할까, 동양의 여자라 혹시 무시당할까 잔뜩 긴장한 채 떠돌던 내가 떠올랐다. 히드로 공항에 처음 내렸을 때 공기와, 냄새와 소리를 만끽하지 못했다. 그때의 유럽 도시와 지금의 서울은 닮았다. 지친 젊음과, 여유로운 중장년층으로 붐비는 명동은, 해와 달이 함께 빛을 내는 동네의 성당에 간다. 우리가 일상에서 20미터에 이르는 천장아래 설 수 있을까 우리가 일상에서, 벽..
겨울은 미래 완료
처음 겨울을 맞이한 옛사람들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입성도 변변찮고, 여퉈둔 식량도 하나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기온이 확 떨어지며 온 세상의 생명체들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들은 겨울 그 자체 보다, 다시 봄이 올 수 있을까가 더 두렵고 막막했으리. 그들과 달리. 우리는 안다. 언젠가 봄이 온다는 것을, 겨울을 견디다 보면 마침내, 봄이 온다는 것을, 겨울은 달고 시원한 계절이다. 11월부터가 겨울이라면, 그즈음부터는, 달고 시원한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무, 배를 시작으로 배추, 굴, 고구마, 사과, 감 등, 희미한 단맛과 시원한 뒷맛을 가진 것들 천지다. 쓰고 추운 겨울을 견디려면 우선 달고 시원한 먹거리들을 넉넉하게 준비해야 한다. 김장하고, 고구마, 배, 무, 감, 사과 등속을 곳간에 쟁여 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