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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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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8시에 떠나네, 어머니 생신은 동지다.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잡귀를 없애기 위해 팥죽을 먹는 날, 황진이가 잘라버린 날, 그 날을 위해 나는 기차를 탄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케익을 주문하고 카드를 쓴다. 식당을 예약하고 초대를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남편을 잃은 엄마는, 긴 동지를 홀로 보내셔야 한다. 엄마는 아빠를 잃었고 엄마를 잃었으며 이제 남편도 잃으셨다. 생각해보니. 나의 시어머니도 그러시네. 아빠를 잃고, 남동생을 잃고 여동생도 잃고 엄마를 잃고, 첫 남편을 잃고 두번째 남편을 잃고, 두분 모두 아주 긴 밤을 보내시리. 한 허리를 버혀낼 수 있다면 어룬님 오신날 밤이..
증기 기관차는 여전히 달린다. 증기 기관차는 여전히 달린다. 가양 대교 남단에 거봉 만두라는 가게가 있다. 젊고 잘 생긴 사장님이 일년 내내 하루도 빠짐 없이 큰 찜통 앞에서 쉴새없이 만두니, 찐빵을 꺼내 손님들에게 건낸다. 보라빛 거봉모양의 상표가 뭔가 좀 어색하긴 한데, 그렇게 보자면, 젊고 키크고 잘 생긴 사장님도, 찐빵, 찐 만두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한 겨울이 되면 비닐로, 차양을 쳐서, 손님들이 잠시라도 추위를 피해 기다릴 수 있다. 바람이 불고 추운 날일수록, 찜통에서 나는 증기는 더욱 이목을 끈다. 온천수처럼, 흰 눈처럼 그저 반갑다. 뜨거운 증기가 가게를 메우고 거리까지 나오면 전혀 살 마음이 없었던 사람들 마저도 하나 먹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 그 증기에 싸인 손님들이 웃는 모습도 아름답다. 커다란 뚜껑을..
귀촉도- 머리로 신이나 삼아줄걸 귀촉도 서 정 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구비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은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1943년 작이다. 벌써, 80년전에 태어난 시다. 백발이 되어 백세를 바라보는 시다. 나는 서정주의 시를 좋아했다. 일단 시인의 이름이 시인다웠다. 서정 주라니. 서정의 나라, 서정의 술, 서정의 주인 등등, 호는 더 마음에 들었다. 미당이라..
깨를 갈다. 최유라를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유라의 몇 마디를 기억하고 있다. 한참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느라, 정신없을 때, "아스티에 빌라트" 찻잔을 보고 반했단다. 굉장히 부담되는 가격이었는데, 일단 찻잔 하나 샀다고 한다. 아침 일과를 끝내고, 찻잔을 들고 앉았다고 했다. 좁은 집이라, 4인용 식탁이 겨우 들어가는 부엌에 그 찻잔을 들고 앉았다고 했다. 흰 찻잔을 들고 있는 30대 주부 주위로 가로등이 켜진 것 같았다. 연극 무대 같았다. 어떤 그림 같았다. 나는 그녀의 엄청난 그릇을 보기도 전에 질려버렸고 정녕 하나도 부럽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30대를 버티게 해준 흰 찻잔, 그녀가 요리할 때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나물류를 무칠때 마지막에 깨를 조그만 절구에 ..
신륵사 가람 배치 뭐 그런 말할 자격이 없으나, 그 절은 좀 이상했다. 일단, 산을 등지고 강앞에 있었고, 불이문이니, 일주문의 위치도 절 안에 정자가 있는 것도, 대웅전없고, 사당 안에 동종과, 탱화가 그려진 것도, 다 신기했다. 여주는 단청이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진정한 가람 배치는 자연을 고려해서,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국보, 보물, 지방 문화재 등의 기준은 과연 누가 정할 수 있는가, 절 앞의 벽돌로 된 탑도, 극락전 앞의 탑고,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데도, 뭔가 달라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마음에 든다. 여주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햇살과, 흙이 기름진 곳이었다. 그곳의 강가 사찰이라니, 시내에 있는 절이라니. 다시 차가 있으면 좋겠고, 다시 여행을 다니고 싶고, 하루에 여러..
남자는 시계지-세종대왕릉 나의 큰 외삼촌은 외자 이름이다. 이 영. 참 이상했다. 오얏 리, 꽃뿌리 영이라고 했다. 내 이름도 특이하기에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가를 잘안다. 삼촌은 그러니까 오얏의 꽃뿌리, 삼촌의 삶이 그리 꽃다웠었나, 잘 모르겠다. 꽃다웠던 때도 있었겠지. 큰 조카인 내게 삼촌은 첫 손목 시계를 사셨다. 공책과, 펜과, 책들, 그 모든 것들 아낌없이 주셨다. 세종 대왕릉도 영릉이란다. 꽃뿌리 무덤, 그리고 조선 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란다. 한글을 만든 세종 대왕의 무덤이라니,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멀어도 가서 뵈야지. 엄포에 비해 날씨는 견딜만 했다. 바람은 쌀쌀했으나, 햇살이 도탑고 따수웠다. 미세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왕릉으로 올라가기 전, 들른 광장이 흥미로웠다. 중국의 황..
난독증 나는 공문서도, 나는 매뉴얼도 나는 설명서도 잘 못읽는다.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실용적인 글 자체를 읽고 이해하지를 못한다. 사람의 마음도 표정도, 말도, 상대방더러 탓하기 전에 나부터 돌아보자
지문 사냥꾼에서 홍채 사냥꾼으로 동사무소에 공인 서류를 떼러 갔다. 인터넷으로 떼면 무료, 무인 자동 발급기는 500원 창구에서는 1000원, 기계에서는 늘 그렇듯 잘 되지 않는다. 역시 나는 기계가 싫어해 창구 가서, 가족 관계 증명서 상세를 부탁하다가, 손가락 지문을 잘 읽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공무원이 날 도와준다. 지문을 확인해보겠노라며 엄지르 여러번 대보았다. 물로 닦아가며 반복해서, 왼손 엄지도, 나는 남보다 지문이 많이 연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른쪽 검지 확인해보더니 엄지보다는 낫다며넛, 이걸로 등록을 하려면 사진을 들고 와서, 신분증을 다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어쩌자고, 지문이 다 닳아버렸을까, 지문이 다 닳도록 나는 무엇을 했을까, 그래서일까, 아이폰이나, 미니도 암호 입력할 때마다 고생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