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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 결혼식이 끝나고 이제 어떡하지 싶었다. 땋아서,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올린 머리를 풀면서, 이걸 어떡하지.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꽃대궐같은 상을 받으면서도 이제 어떡하지 싶었다. 신혼집에서 결혼전 물건을 택배로 받았을 때 이제 어떡하지 싶었다. 병원에서 출산 후 산후 조리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기와 단 둘만 남았을 때 이제 어떡하지 싶었다. 이제 어떡하지 황망하던 우두망찰하던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면서,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멈춰 버린 거리에서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하지. 졸업은 했지만, 갈 곳도 살 집도 아무것도 없던 내가 홀로 서소문에서 서울역 쪽으로 가다가, 이제 어떡하지. 운전 면허를 따고 차를 사서, 연수를 받고서도 처음 차를 운전할 때 이제 어떡하지. 두려움, 이물감, 달..
모스크바의 신사, 나발니 사망 "나발니"의 사망소식을 듣고선, "모스크바의 신사"를 계속 읽을 수가 없다. Amor Towles는 "A Gentleman in Moscow" 에서 메트로폴 호텔에 평생 가택 연급된 구러시아 귀족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를 그렸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시대의 변화, 물리적 공간의 제약에 지혜와 긍지로 적응해가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삶에서 아름다움과 목적을 발견해냈다. 몇년이 지나 다시 봐도 대단하지만, 뭔가 불편하다. 미국의 낙관주의와 회복 탄력성이 작가가 평생 누린 풍요와 만나, 하필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와인, 캐비어 등의 미식과 고가구, 결투와, 맞춤 정장, 세련된 매너와 교양이 오히려 불편하고 겉돈다. 지극히 연극적이라 , 현실감이 떨어진다. 정치하여 값 비싼 물건들을 옥션에서 구경하는 기분마저 ..
이런저런 미스 디올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에이다 해리스가 디올 드레스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아 파리 몽테뉴 거리, 하우스 오브 디올에 다녀온 이야기이다. 1957년 영국의 에이다 해리스는 전쟁 미망인으로 청소를 하며 살아간다. 라비상트란 디오르 드레스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꿈의 드레스를 파리 크리스찬 디오르에서 사려 마음먹는다. 주변 친구들의 도움과, 스포츠 복권, 경마 , 분실물 사례금, 미망인 연금 등으로 500파운드를 모은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약, 1600만원 정도라고 한다. 파리에서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디오르 10주년 쇼를 직접 구경하고 드레스를 주문한다. 1주일간 푸벨 여동생 집에 머물면서, 후작과의 데이트, 디오르 직원들과의 친목과 우정 , 파리 청소부들의 시위 등을 경험한다. 최상류층 단골 손님의 훼방으로 73번 템테이션 ..
증명 사진 거의 30년만에 증명 사진을 찍었다. 주민 등록증, 운전 면허, 여권 갱신위해, 증명사진, 여권 사진을 찍었다. 맘 까페며 주부 까페, 대학가에서 추천하는 곳으로 골랐다. 어쩌면 이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머리를 감고 화장도 적당히 했다. 3대째 사진관을 운영한다는 곳이었다. 모든 것을 사장님이 알아서 하신단다. 원본을 보니, 세월을 정통으로 맞았구나 싶었다. 좌우 대칭이 맞지 않고, 눈은 작아지고, 살은 쳐지니 이중턱에, 얼굴에는 잡티도 한 가득이다. 목은 주름이 선명한데다 어쩐지 굵고 짧아진 둣하다. 사람들이 2번 놀란단다. 증명 사진을 찍은 후 놀라고 보정 후 달라진 모습에 더 놀란다신다. 사장님은 지우개 같은 걸로, 쓱쓱싹싹 지우신다. 쳐진 턱을 쳐내고(양악 수술이네), 눈꼬리를 올리고(상안검인..
등잔 밑을 밝히는 한 번역가의 루틴을 들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책상에 앉는 것이 근무의 시작이라고 했다. 책상의 램프를 끄면서 일과가 끝난다고 했다. 책상 램프를 끈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방의 스위치도 아니고, 형광등도 아니고, 책상 위의 램프를 내리면서 하루가 끝이 나다니. 여자 친구에게 선물받은 도자기 인형이란다 , 그녀와 헤어진 후 물건을 정리하려는데 도저히 버리지 못해 흰색으로 페인트칠해 버렸단다. 그러고서, 램프 아래 두었더니, 제 자리구나 싶더란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이야기가 선명하길래, 어렵사리 그 도록을 찾아냈다 한데 내 기억속의 도자기 인형과 많이 다르다 남의 이야기는 내게 흘러 들어와서 내 이야기로 변해버린다. 오롯이 전부 내 것은 없다 . 이미 흰 빛으로 덧칠한 그녀가, 등잔불 ..
리치몬드에서 아침을 소세지 굽고, 달걀 프라이해서, 구운 빵, 샐러드와 함께 먹는 브런치가 유행했다. 예약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브런치 전문 식당도 많았다. 아이들 학교 보낸 후, 엄마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밥 먹는 식당은 지금도 성업 중이란다. 방학내내 아이들 돌보느라 정신없었던 엄마들이 개학 후에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느즈막이 일어나서, 간단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아침 겸 점심,, 삼시 세끼라는 말이 부담스러워진지 꽤 되었다. 현대인의 신체 활동이 줄어들기도 했고, 먹을 것이 넘쳐 나고, 영양 과잉으로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하루 2끼면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간단히 먹고, 저녁은 가족과 함께 혹은 약속으로 제대로 먹는다고 한다. 하루 2끼면 충분하다는 말을..
시어머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요. 명절 후 음력 정월 나흘이시라, 평생, 제대로 축하를 못받으셨다는데, 이제는 어머님의 부모님도 형제 자매도 다 세상을 뜨고 아버님도 소천하시고, 홀로 남으셨단다. 막내 아들의 식당에서, 사돈 식구들 다 초대해서, 생일을 축하해드렸다. 시간 내서 멀리 찾아주고, 더 큰 소리로 박수치고 노래해준 나의 가족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다가 1900년대 ㅎ삼성여고를 졸업했다. 산등성에 올라 감천항이 보이는 삼성여고, 공부 잘하고, 기가 센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삼성여고, 그 당시 40대였던 선생님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얼라들"이라 그저 맑고 아기같다. 신기한 게 그때 아이들 얼굴이 다 기억난다. 이름도 꽤 많이 생각나고, 아직 내 얼굴은 차마 보지 못했다. 그 애들 중 상당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애들을 우연히 만나도 더이상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래된 사진첩을 다시 찾아 보는 일은 뭐랄까, 계곡물 근처 돌을 드러내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돌을 들어 올렸더니, 수많은 조그만 벌레들이 혼비백산 사방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숨어 느긋하게 살던 벌레들이 갑작스레 조명을 받고서 놀라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을 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