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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몬드에서 아침을 소세지 굽고, 달걀 프라이해서, 구운 빵, 샐러드와 함께 먹는 브런치가 유행했다. 예약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있는 브런치 전문 식당도 많았다. 아이들 학교 보낸 후, 엄마들끼리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밥 먹는 식당은 지금도 성업 중이란다. 방학내내 아이들 돌보느라 정신없었던 엄마들이 개학 후에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느즈막이 일어나서, 간단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아침 겸 점심,, 삼시 세끼라는 말이 부담스러워진지 꽤 되었다. 현대인의 신체 활동이 줄어들기도 했고, 먹을 것이 넘쳐 나고, 영양 과잉으로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하루 2끼면 충분하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간단히 먹고, 저녁은 가족과 함께 혹은 약속으로 제대로 먹는다고 한다. 하루 2끼면 충분하다는 말을..
시어머니 생신을 축하합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셔요. 명절 후 음력 정월 나흘이시라, 평생, 제대로 축하를 못받으셨다는데, 이제는 어머님의 부모님도 형제 자매도 다 세상을 뜨고 아버님도 소천하시고, 홀로 남으셨단다. 막내 아들의 식당에서, 사돈 식구들 다 초대해서, 생일을 축하해드렸다. 시간 내서 멀리 찾아주고, 더 큰 소리로 박수치고 노래해준 나의 가족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보다가 1900년대 ㅎ삼성여고를 졸업했다. 산등성에 올라 감천항이 보이는 삼성여고, 공부 잘하고, 기가 센 미인들이 많기로 유명한 삼성여고, 그 당시 40대였던 선생님들은 지금의 나보다 더 "얼라들"이라 그저 맑고 아기같다. 신기한 게 그때 아이들 얼굴이 다 기억난다. 이름도 꽤 많이 생각나고, 아직 내 얼굴은 차마 보지 못했다. 그 애들 중 상당수는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애들을 우연히 만나도 더이상 서로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오래된 사진첩을 다시 찾아 보는 일은 뭐랄까, 계곡물 근처 돌을 드러내서,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돌을 들어 올렸더니, 수많은 조그만 벌레들이 혼비백산 사방으로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숨어 느긋하게 살던 벌레들이 갑작스레 조명을 받고서 놀라 후다닥 도망치는 모습을 보는 것..
homeless VS houseless 프랑스 파리를 갔을 때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에펠탑이 아니다. 루브르도 아니다. 센 강도 아니다. 까페였다. 빠리 시내의 좁고 낡지만 무지하게 비싼 집에는 없는 거실이, 주방이 바로 거리의 까페란다. 빠리 시내의 좁고 낡지만 무지하게 비싼 집에는 옷을 둘 곳이 없어서, 그들의 스타일은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세계 최고의 멋쟁이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소유는 최소로 하고, 도시에 외주주기, 도시와 나누기, 도시로부터 빌리기 그러니까, 빠리의 공원, 미술관, 까페, 레스토랑, 도서관, 강을 전세계와 나누며 함께 걸으며 보고, 이야기하고 집에, 아니 방으로 돌아가 지쳐서 곧바로 잠들것, 아무리 파리의 야경이 시끄러워도 일찍 푹 잠들것, 도시더러 밤새 반짝이라 시키고,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일어날 것. 그런..
오빠가 돌아왔다. 중년 부부가, 서로 존대하며 "여보" "당신"이라고 칭하는 모습은 보기 좋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도 보기 좋다. 허물없이 편하지만, 서로를 깍듯이 대접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부럽다. 한데 남편을 그냥 "아빠"라고 부를 때는 좀 어색하다. 누구의 아빠란 뜻일까, 자신의 아빠인가, 자식들의 아빠인가, 그렇지만, 희끗희끗한 머리를 하고서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여인은 어쩐지 귀엽다. 대학 시절,남자 선배를 "형"이라 부르는게 원칙이었으나, 나는 꿋꿋이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생각" 란 동요도 즐겨 불렀다. 남동생을 바래던 집안의 세 자매 중 첫째라 오빠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오빠를 남편으로도 꿈꿨다. 2-3살은 손위였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바보같은 ..
도둑맞은 가난, 한동훈이 "스타벅스는 서민들이 못오는 곳"이라 하고 백사 마을 가서, 연탄을 날랐다고 한다. "도둑맞은 가난"을 가져와, 매번 선거때마다, 서민을 위하는 척 연기하는 정치인들을 비꼬는 칼럼도 보였다. 1971년 나목으로 여성 동아에 등단하여,40년간 "서 있는 여자"로 줄기차게 중산층의 허위와 속물의식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듯, 보여줬던 박완서 작가의 비교적 초기작이다. 가난도 도둑맞을 수 있을까, 구로동 쪽방촌, 노동 운동하던 대학생들과 여공의 이야기로도 얼마든 바꿀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 봤던 소설이다. 다시 보니. 가난을 대하는 여러 태도가 보인다 상훈과, 상훈 아버지. 여 주인공과 그 부모님, 어머니의 친구들,, 박완서 - 도둑 맞은 가난 상훈이가 오늘 또 좀 아니꼽게 굴었다. 찌개 냄비를 열자 두부점..
MZ Park! 안녕하세요? 제가 처음 뵌지 40년이 넘었네요? 40년만에 갑자기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박씨 부인"전이란 책에서 뵈었습니다. 허물을 벗고, 도술을 부려 적을 물리치고, 등등, 전래 동화에서 만난 위인들과 달랐어요. 뭔가 달라 보인다는 건, 그건 관심이고, 그건 사랑 아닐까요? 그러다가, 전 당신을 오래도록 잊고 지냈습니다.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박여사. 박 언니, 박 자매. 사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요. 남편의 지위에 따라, 층위를 둔 것같은 여사도,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만 쓰고 싶은 언니도, 가족을 넘어 종교에서도 두루 쓰이는 자매 역시 딱 맞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냥 Park라고 하겠습니다. 박달 나무 일까, 밝음 일까, 밖일까, 무슨 뜻일까 궁금해서, 그..
고래를 찾아서 용산에 중앙 국립 박물관이 재개관했을 때 나는 8000년전의 고래를 만났다 . 1층 선사시대관 입구에는 반구대 암각화 탁본이 걸려있었다. 그 앞 에서 아주 오래동안 서있었다. 울주군 언양면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탁본에서 나는 고래를 찾았다. 고래 잡이를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 그는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헤엄치며 놀았다고 했다. 전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 고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희귀한 곳이라고 들었다. 신석기 말 청동기 초로 추정되는 무려 8000년전, 고래 사냥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며 자랐다고 했다. 여름에 가물어 수위가 낮아지면 가까이 가서 볼 수 도 있는데 배를 타거나 헤엄쳐 가서 봐야 한다고 했다. 근처의 사연댐이 준공되면서, 수몰될 뻔하다가 겨우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나를 데..